레이건은 눈앞의 여인을 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황제의 명령대로 그녀를 황궁으로 데려가야 한다.
그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카시아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났고,
붉은 숲의 안개가 그녀의 실루엣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유혹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땅의 주인이었고,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존재였다.
그녀를 마주한 순간, 레이건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여자는 위험하다.
그러나 그 위험은 단순한 육체적 위협이 아니었다.
그녀는 강렬한 존재감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고 단단했다.
공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온 자신이지만,
그녀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날 바라보는 거죠, 공작님?"
카시아가 낮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울렸다.
"혹시 마음이 흔들리는 건가요?"
레이건은 미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강제로 시선을 돌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임무를 잊은 적은 없다."
"그래요?"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기운이 마치 숲 전체를 지배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날 사로잡으세요, 공작님."
레이건은 검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고, 저항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황제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카시아를 데려와라. 그녀의 능력은 제국이 가져야 할 힘이다."
그녀의 능력.
그것이 단순히 용을 길들이는 것이라면?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카시아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짓에 붉은 숲이 반응했다.
안개가 움직였고, 나뭇잎이 흔들렸다.
그녀의 존재 하나만으로 숲이 반응하는 모습에 레이건은 다시금 깨달았다.
이곳은 그녀의 땅이었다.
붉은 용이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낮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 한 번의 포효만으로도 숲은 다시금 요동쳤다.
"보이시나요, 공작님?"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숲은 날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저 용도 마찬가지죠."
그녀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레이건은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기운이 마치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그녀는 단순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법과 생명이 융합된 존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확신과 힘이 담겨 있었다.
"결국 공작님도 황제의 도구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
그녀의 질문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문제였다.
그는 항상 황제의 명령을 따랐다.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 앞에서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붉은 용이 다시 포효했다. 그것은 경고였다.
그리고 동시에 질문이기도 했다.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카시아가 다시 한 걸음 다가오자,
레이건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를 묶어 황궁으로 데려갈 건가요?"
그녀는 나지막이 물었다.
레이건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지만,
힘을 줄 수 없었다.
그녀의 피부는 놀랍도록 따뜻했고,
마치 살아있는 마법이 깃든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 여자는 단순한 이단자가 아니다.
그녀는 제국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다.
카시아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열렸다.
"공작님, 이제 선택하세요."
그리고 그 순간, 붉은 숲이 다시 한 번 요동쳤다.
레이건은 눈앞의 여인을 보며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아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