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은 아직도 손목의 시계를 감싸 쥔 채 숨을 골랐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빛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이연의 경계 어린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말 기묘한 여인이군.”
이연이 다시 한 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겠다는 듯 날카로웠다.
수진은 침착하려 애썼지만, 그의 시선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밤중에 홀로 정원을 거닐다가,
갑자기 빛 속에서 나타난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내 착각이오?”
수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계의 힘을 들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연은 이미 그녀가 단순한 기억 상실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그저 바람을 쐬고 싶었어요. 그리고…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이연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믿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겠소. 지금은.”
그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지금은 더 묻지 않겠지만, 결코 그녀를 놓아두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다음 날 아침, 수진은 여전히 머리가 무거운 느낌을 받으며 눈을 떴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시계를 사용할 때마다 느껴지는 극심한 피로감은 여전했다.
이 상태로 계속 시간을 넘나든다면, 그녀의 몸이 버틸 수 있을까?
이연이 대청마루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수진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연과 맞서고 있는 사람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옷차림으로 보아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했다.
“이연 도령, 이제 슬슬 결정을 내릴 때가 되지 않았소?”
사내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위협이 서려 있었다. 이연은 표정을 굳히며 답했다.
“내가 원한다고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오.”
“허나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이 싸움에 휘말리게 될 것이오. 왕위 계승은 단순한 선택이 아닙니다.”
수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연이 단순한 귀족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이연이 조용히 말했다.
“내가 왕이 된다면, 그것은 내 뜻이 아니라 조선의 뜻이어야 하오.”
그의 단호한 말에 사내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 생각하는 동안, 당신은 계속 위험에 처할 것이오.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게 말을 남긴 채, 사내는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존재가 사라지자마자, 이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수진은 그날 저녁, 조심스럽게 이연에게 다가갔다.
그는 서책을 펼쳐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해가 되는 건 아니죠?”
이연은 고개를 들고 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과 경계가 서려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수진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이연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역사 속의 이연과, 지금 눈앞에 있는 이연은 너무나도 달랐다.
“저도 알고 싶어요.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이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을 알고도 모른다는 듯 묻다니, 기이한 여인이군.”
수진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왕이 될 운명인가요?”
이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말은 쉽게 할 것이 아니오.”
“하지만… 당신이 그 중심에 있다는 건 사실 아닌가요?”
이연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권력을 원하지 않소.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그 운명을 외면할 수도 없을 것이오.”
수진은 그가 짊어진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가 이 시대에 온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시계는 점점 그녀의 몸을 쇠약하게 만들고 있었고, 그녀는 조만간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연을 돕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떠나는 것인가.
그 선택이, 그녀의 운명을 바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