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은 멍하니 강주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연과 똑같았지만, 표정과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이연이 따뜻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면, 강주현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어딘가 익숙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네가 돌아왔다는 건, 이제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야.”
그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수진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빛을 잃은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연이… 나를 찾으려 했다고요?”
강주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네가 떠난 후 평생을 바쳐 시간을 연구했어. 네가 왜 사라졌는지,
어디로 갔는지. 네가 돌아오길 바라면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수진은 손을 떨며 물었다.
“그럼… 그는 결국?”
강주현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연은 그녀를 기다리다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수진은 충격을 받았지만, 강주현은 그녀에게 더 큰 진실을 던졌다.
“너는 단순한 시간 여행자가 아니야. 너는 역사를 바꾸고 있어.”
수진은 그 말을 곱씹었다.
“제가 역사를 바꾼다고요?”
“그래.”
강주현은 무언가를 찾아 서랍에서 오래된 문서를 꺼냈다.
바랜 종이에 적힌 글씨는 한자였다.
그것을 읽는 순간, 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연 도령이 사랑한 여인은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녀가 떠난 후 그는 시간을 거슬러 그녀를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끝내 닿지 못하고, 그 뒤로 왕실은 혼란에 빠졌다.’
그녀의 존재가 역사를 바꾸고 있었다.
“이건 조선 시대의 기록이에요…”
“네가 조선에 머물면서 일어난 일들, 네가 한 모든 선택이 역사를 조금씩 흔들었어.”
수진은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이연을 돕고자 했을 뿐인데,
그녀의 개입이 조선의 운명을 뒤흔든 것이다.
“그럼… 제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면?”
“더 큰 균열이 생길 수도 있어.”
강주현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도 돌아가겠어?”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손목의 시계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머릿속이 흐려졌다.
‘…어?’
갑자기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이 지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과거를 하나씩 지워가는 것처럼.
“무슨… 일이죠?”
강주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럴 줄 알았어. 네가 시간을 넘을수록, 네 기억도 점점 사라지는 거야.”
수진은 충격을 받았다.
“제 기억이… 사라진다고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조선에서 있었던 일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연과 나누었던 대화, 그의 미소, 그의 목소리… 모든 것이 점점 희미해졌다.
“안 돼…”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부 기억해야 해. 전부 기억해야 하는데…!”
강주현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네 선택이 중요해.”
수진은 두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을 잊어간다는 사실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심했다.
“돌아갈 거예요.”
강주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너답네.”
그 순간, 시계가 강하게 빛났다.
그리고 수진의 몸이 다시 한 번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진이 느낀 것은 따뜻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포근한 온기가 아니라, 점점 타들어 가는 촛불처럼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해야 할 것들을 다시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
그녀가 처음 이연을 만났던 순간, 그와 함께 나눈 대화, 그의 손길.
그 순간, 그녀의 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이 사라지는 대가는, 시간의 질서를 어긴 자에게 내려지는 벌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시계를 사용할수록, 그녀는 점점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연과의 약속만큼은 잊을 수 없었다. 그가 남긴 흔적, 그가 남긴 사랑.
수진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을 바꾸고 싶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빛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이연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설령 그 대가가 모든 기억을 잃는 것이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