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은 밤새 뒤척였다.
익숙하지 않은 이불과 방 안을 가득 채운 나무 향,
그리고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희미한 빗소리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러나 가장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손목에 채워진 채 빛을 잃은 시계였다.
‘돌아가야 해.’
이연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서 지낼 수는 있지만,
이곳은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그녀가 살아온 현대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이 시대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시계를 손으로 감쌌다.
다시 빛을 낼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있을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시계의 용두를 돌려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작동하지 않는 거야…?’
그녀는 조바심이 났다. 혹시 배터리가 필요하다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면 시계를 작동시키는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일까?
그녀는 시계를 조작하며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지만,
시계는 차갑게 식어 있을 뿐이었다.
그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괜찮소?”
이연의 목소리였다. 수진은 급히 시계를 소매 속에 숨기고 문을 열었다.
“네,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이연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작은 차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차를 마시면 도움이 될 것이오.”
수진은 감사 인사를 건넨 후,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한약재 향이 몸을 감싸며 조금씩 긴장을 풀어주었다.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오.”
이연이 말했다.
“기억을 잃었다 하였으니, 이곳이 낯설겠지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오해하는 덕분에 자신이 현대에서 왔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기억을 찾을 방법은 없을까요?”
이연은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잃은 이들이 돌연 어떤 계기를 통해 떠올리는 경우가 있소.
혹시 무엇인가 몸에 지닌 물건이 있소?”
순간, 수진은 손목을 감쌌다.
시계. 이연에게 보여줘도 괜찮을까?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는 이 시계를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아무것도 없어요.”
이연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오. 기억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오.”
며칠이 지나도 시계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수진은 여러 차례 혼자 있을 때마다 시계를 조작하려 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사건이 그녀에게 단서를 주었다.
이날은 이연이 한양에서 중요한 인물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그는 수진이 혼자 지낼 수 있도록 거처를 조용히 정리해두고 떠났다.
수진은 그가 떠난 후, 마당에서 하인들이 하는 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공간이 눈에 띄었다.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정자였다.
이상하게도 그곳이 그녀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다가가 정자의 돌기둥을 손으로 만지자,
갑자기 손목의 시계가 희미하게 빛났다.
‘지금 뭐가…?’
수진은 순간 깜짝 놀랐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이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시계가 다시 작동하려는 걸까? 아니면, 이곳이 어떤 특별한 장소이기 때문일까?
‘혹시… 특정한 장소에서만 작동하는 걸까?’
수진은 심호흡을 하고, 손목의 시계를 다시 조작해 보았다.
그리고 순간, 눈앞이 흔들리며 세상이 일그러졌다.
눈을 뜨니, 그녀는 한밤중의 한양에 서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도 밝았던 하늘이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길거리는 한산했다. 마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 듯한 느낌이었다.
‘설마… 시간이 이동한 거야?’
그러나 흥분도 잠시, 수진은 갑작스러운 두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몸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마치 자신의 생명력이 급속도로 소모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멈추시오.”
수진은 몸을 돌렸다. 눈앞에는 놀랍게도 이연이 서 있었다.
그는 마치 그녀를 예상이라도 한 듯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 늦은 밤에 이곳에 있는 것이오?”
수진은 당황했다. 시간을 이동한 것이 들키면 안 된다.
하지만 이연의 눈빛은 이미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을 나왔어요.”
이연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으로 향하는 순간,
수진은 반사적으로 소매를 당겨 시계를 가렸다.
그러나 이연은 이미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
“당신은… 단순한 귀족의 딸이 아니군요.”
그 말에 수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손목의 시계가 다시 빛나며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수진은 마지막으로 이연의 놀란 얼굴을 본 후, 다시 한 번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떴을 때, 수진은 다시 낮이 된 한양에 서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거리의 사람들, 풍경, 그리고 공기까지. 분명히 같은 장소였지만,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설마… 내가 시간을 다시 이동한 거야?’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시계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작동할 수 있으며,
이동할 때마다 그녀의 몸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아예 빛을 잃은 듯했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정말 기묘한 여인이군.”
다시, 검은 갓을 쓴 남자.
하지만 이번에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전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당신을 놓치지 않을 것이오.”
그 순간, 수진은 깨달았다.
그녀의 존재가 이연에게 완전히 들켜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