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는 다음 날 저녁,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회사에서 늘 입던 단정한 스타일이었지만,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냥 평소처럼 만나면 돼.’ 스스로 다짐하며 가방을 들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강지훈이 지정한 조용한 레스토랑이었다.
고급스럽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의 곳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직원이 그녀를 안내했고,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강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왔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게임 속에서 듣던 제이든의 목소리와 같았지만,
현실 속에서는 묘하게 더 깊게 울려 퍼지는 느낌이었다.
윤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생각보다 조용한 곳이네요.”
“너무 시끄러우면 대화하기 힘들잖아.”
그의 배려심에 윤하는 작게 웃었다.
메뉴를 고르는 동안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평소 게임 속에서는 수없이 대화를 나눴지만, 막상 현실에서 마주 앉으니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음… 어제 게임에서는 다르게 말하더니요.”
윤하가 가볍게 농담하듯 말하자, 강지훈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게임 속에서는 더 쉽게 말했나?”
“현실에서는 조금 다른가 봐요.”
“그래도 난 똑같아. 네 앞에서는.”
그의 말에 윤하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게임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는 변함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가 나오고, 두 사람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점점 더 서로의 현실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너는 원래부터 VR 게임을 좋아했어?”
“네. 현실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잖아요. 제이든… 아니, 부사장님은요?”
그녀가 자연스럽게 ‘제이든’이라고 부를 뻔하다가 정정하자,
강지훈이 가볍게 웃었다.
“그냥 지훈이라고 불러.”
“네?”
“게임에서도 서로 별명 없이 불렀잖아. 현실에서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나?”
윤하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지훈 씨.”
그의 표정이 순간 부드러워졌다. 윤하는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강지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윤하.”
그녀는 다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강지훈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너한테 시간을 주겠다고 했지만, 나도 내 마음을 숨길 수는 없을 것 같아.”
윤하는 숨을 삼켰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직감적으로 알 것 같았다.
“게임 속이든 현실이든, 난 네가 좋다.”
단순한 고백이었지만, 그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윤하는 가슴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강지훈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윤하는 순간적으로 게임 속에서 함께 싸웠던 순간들,
그가 자신을 보호해줬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배려와 진심이 떠올랐다.
“…저도, 지훈 씨랑 같이 있는 게 좋아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답하자, 강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천천히 해볼까?”
윤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속에서 시작된 관계가 이제 현실에서도 이어질 수 있을까?
그녀는 아직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