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가 끝난 후에도 한지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대표가 논리적으로만 사고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감성을 배제할 줄은 몰랐다.
‘감성은 수단이 아니라 핵심이라고요, 대표님.’
지수는 투덜대며 팀원들과 함께 기획 방향을 정리하기 위해
회의실에 남았다. 팀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지수 씨 말이 맞긴 해. 요즘 트렌드는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이잖아."
"근데 대표님 말도 틀린 건 아니지 않아?
브랜드 신뢰도를 쌓으려면 단기적인 감성 광고보다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긴 하잖아."
지수는 답답한 마음에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
"그래서 너무 데이터만 믿고 가면,
소비자가 반응하기 전에 광고가 재미없어지는 거라고요!
우리 광고는 감성으로 승부 봐야 해요."
그 순간, 조용히 팀원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이선우가 입을 열었다.
"감성만으로 성공하면 실패 확률도 높아지죠."
지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이선우는 회의실 문가에 서 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지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했다.
"대표님, 엿듣기에 취미 있으세요?"
"회의를 위해 다시 왔을 뿐입니다."
이선우는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광고는 감성적인 접근도 중요하지만, 그 감성을 전략적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히 감성을 앞세운 영상이 아니라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장기적인 플랜이 필요합니다."
지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게 감성적이어야 소비자도 반응하죠.
요즘은 바이럴이 중요한 시대잖아요.
직관적인 아이디어가 사람들한테 더 와닿는다니까요?"
이선우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직관적인 아이디어가 구체적으로 뭔가요?"
"예를 들어…"
지수는 빠르게 노트북을 열어 최근 유행하는 광고 사례를 찾았다.
"보세요. 이 광고, 스토리도 단순하고 감성적으로 접근했는데
조회수 1,000만 뷰 찍었어요. 이런 게 요즘 먹힌다고요."
이선우는 화면을 힐끔 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이 광고가 실제 매출 증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분석하셨나요?
조회수가 높다고 반드시 매출 상승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지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그건…"
"마케팅 전략은 조회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소비자의 행동 변화까지 분석해야 합니다."
이선우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광고는 단순한 바이럴 영상이 아니라
브랜드를 구축하는 장기적인 전략이 되어야 합니다.
감성적인 광고가 나쁜 건 아닙니다.
다만 감성만으로는 지속적인 성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겁니다."
지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진짜 재미없다… 대표님 스타일은."
이선우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되물었다.
"재미가 중요한가요?"
지수는 답답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광고가 재미없으면 소비자도 관심을 안 가진다니까요.
MBTI로 치면 완전 최악의 궁합이에요."
그 순간, 회의실에 있던 몇몇 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선우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순간적으로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듯 보였다.
그러나 지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어? 방금 살짝 웃은 거 맞지?’
하지만 이선우는 곧 다시 평소처럼 차가운 표정을 되찾았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결정된 사항에 따라 업무를 진행해 주세요."
그렇게 회의가 끝났지만, 지수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자신이 추진하던 감성 광고 아이디어가 결국 채택되긴 했지만,
이선우는 여전히 그에 대한 확신이 없어 보였다.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MBTI가 다르면 사랑도 힘들다는데, 일도 힘드네."
그녀는 노트북을 챙기면서도 여전히 이선우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과연 내 방식이 맞을까? 아니지, 대표님이 너무 딱딱한 거야.’
하지만 어딘가 마음 한편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그 남자의 논리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다음 회의에서는 반드시 내 방식이 효과적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