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예고 없이 내렸다.
낮부터 흐렸던 하늘은 결국 참지 못하고 굵은 빗방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지수는 퇴근 후 사무실 앞에서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봤다.
우산을 두고 온 걸 깨달았지만,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기가 귀찮았다.
‘그냥 뛰어갈까…?’
고민하던 찰나, 비가 점점 더 거세졌다.
지수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택시를 부르려 했지만 비 오는 저녁이라 그런지 배차가 늦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가방을 머리 위에 올리고 뛰기 위해 몸을 낮추려 했다.
그 순간, 머리 위로 어둠이 드리웠다.
지수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위에서 커다란 검은 우산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우산을 든 사람은… 이선우였다.
"대표님...?"
선우는 우산을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지수를 내려다봤다.
"우산 없이 그냥 갈 생각이었습니까?"
지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우가 이렇게까지 챙겨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아, 그냥… 집이 가까워서요."
선우는 짧게 한숨을 쉬며 우산을 더 가까이 당겼다.
"괜한 감기 걸리지 마세요."
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단정한 모습이었다.
비를 맞지 않도록 거리까지 신경 쓰며 지수를 감싸주는 모습이 의외였다.
둘은 말없이 빗속을 걸었다.
정류장까지의 거리는 길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조용한 분위기를 깨듯, 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 감정 없으신 줄 알았는데요?"
선우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없진 않죠. 안 드러낼 뿐입니다."
지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면 아까처럼 다정하게 행동하는 건,
감정을 드러낸 게 아닌가요?"
선우는 잠시 고민하듯 지수를 바라보다가,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꼭 감정을 드러내야만 다정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니까 하는 겁니다."
지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선우를 바라보았다.
분명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선우는 한마디 덧붙였다.
"다음부터는 우산 챙기세요."
지수는 선우의 우산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음부터는 안 까먹을게요."
그날 밤,
지수는 잠들기 전 선우가 우산을 씌워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빗속에서 아무 말 없이 우산을 내밀던 그의 손길이 자꾸만 떠올랐다.
단순한 배려일 수도 있었지만, 그게 왠지 모르게 신경 쓰였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에게만 가끔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보여준 멋진 모습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중요한 회의 때마다 날카롭게 분석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
수십 개의 보고서 중에서도 핵심을 단번에 짚어내는 능력.
'일은 또 왜 이렇게 잘하고…'
지수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이미지였던 사람이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자신의 비에 젖은 옷보다 먼저 우산을 내밀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그저 원칙과 논리만 따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이렇게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게 묘하게 신경 쓰였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표현하지 않을 뿐이라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뒤척였다.
낮에는 늘 냉철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가끔씩 예상 밖의 순간에 따뜻한 면을 보이는 사람.
그것도 너무 자연스럽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한테만 더 차가운 걸까?'
그녀는 괜히 혼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차가운 사람처럼 보이는데, 가끔씩 너무 다정하고,
또 너무 완벽하단 말이지…’
문득 낮에 봤던 선우의 단정한 옷차림과 냉철한 표정이 떠올랐다.
‘일할 땐 무섭게 집중하면서도,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쓰는 거 보면… 역시 대단하긴 해.’
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그런데, 왜 자꾸 신경 쓰이지?’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출근하면 또 아무렇지 않게 원칙과
논리만 따지는 대표로 돌아와 있을까?
아니면 오늘처럼 또 다른 의외의 모습을 보일까?
그녀는 기대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우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계속 마음을 두드리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