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은 여전히 동우를 잊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던 그녀는 우연히 한 카페 앞에서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서동우.
아니, 이제는 서지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그가 바 안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저 아세요?”
그의 차가운 한마디에, 그녀의 세상이 다시 한 번 무너지는 듯했다.
서동우는 이제 ‘서지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을 가진 동우가 아니었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온기가 없었다.
감정을 배제한 듯한 싸늘한 표정, 날카롭게 정리된 머리카락,
단정하지만 차가운 분위기.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한수경은 떨리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움켜잡았다. 믿을 수 없었다.
“서동우… 아니, 서지훈… 당신 정말 나를 기억 못 하는 거야?”
지훈은 커피를 내리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
그 한 마디에 수경의 심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그녀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거짓말이야… 동우야, 나야. 한수경이야.”
“한수경…?”
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여전히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리고 점차 깨달았다.
서동우는 자신의 존재를 지운 것이다.
수경은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을 잡으며 심호흡했다.
머릿속이 아득했다. 겨우 찾아낸 그가, 그녀를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동우는 그렇게 쉽게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와 나눈 기억들은 너무나 선명했다.
“서지훈… 그렇다면, 당신은 3년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지훈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곧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저는 이곳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을 뿐입니다.
3년 전이라면, 그때도 여기 있었겠죠.”
“거짓말. 3년 전, 당신은 서동우였어.”
수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지훈은 냉정했다.
“손님, 잘 모르겠네요. 다른 손님도 계시니, 주문하지 않으실 거면…”
그 순간, 수경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너무도 익숙한 체온에 심장이 저릿해졌다.
지훈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손을 뿌리쳤다.
“그만하세요.”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카페를 나와 거리를 걸으며,
수경의 머릿속은 온갖 기억들로 가득 찼다.
동우와 함께했던 시간들, 그의 다정한 웃음, 따뜻한 손길.
그러나 지금의 지훈은 전혀 달랐다.
‘그가 사라진 이유는 뭘까… 왜 나만 기억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필사적으로 단서를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며칠 후, 수경은 우연히 한 오래된 서점을 지나가다가 한 남자를 마주쳤다.
흰 머리를 가진 노인이었다.
“찾고 있구나.”
수경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잊힌 존재. 세상에서 사라진 남자.”
수경은 숨을 삼켰다.
“할아버지… 그게 무슨 뜻이에요?”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책장에서 한 권을 꺼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대가로, 단 한 사람의 기억에만 남게 되었어.”
수경은 경악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가… 왜…”
노인은 조용히 말했다.
“그 선택을 한 건, 바로 그 남자 본인이었지.”
수경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동우가… 스스로 존재를 지웠다고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는 자신의 과거에서 도망치고 싶었어.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도.”
수경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가 꿈꾸던 재회는,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