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가끔… 제가 예전에 알았던 사람 같아요.”
순간, 그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르죠.”
지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수경은 그가 기억을 찾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그때는, 그녀가 그 곁에 있어도 될까?
그녀는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서지훈은 점점 한수경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단골 손님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녀가 오지 않는 날이면 자꾸 창가 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의 하루 일과 속에서 수경의 존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지훈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마음은 그와 반대로 움직였다.
그녀가 말을 걸면 무심코 더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졌고,
그녀가 환하게 웃으면 자신도 따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느 날, 수경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가벼운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지훈이 먼저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선 행동이었다.
수경은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어요.”
그녀는 책을 펼치며 말했다.
“이럴 때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제일이죠.”
지훈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오늘은 카페모카가 좋을 것 같네요.”
수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서지훈 씨가 추천하는 메뉴라면 믿어봐야겠네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고,
지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녀를 위한 커피를 만들 때면 집중력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며칠 후, 카페가 문을 닫을 무렵,
수경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훈은 조용히 다가가 말했다.
“이제 곧 닫을 시간이에요.”
수경은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알아요. 그런데 오늘은 그냥 조금 더 있고 싶네요.”
그녀의 말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감성적이었다.
지훈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럼… 조금 더 계셔도 돼요.”
그 말에 수경이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지훈이 먼저 이런 식으로 배려를 보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그날 이후, 지훈은 점점 더 수경과 가까워지는 자신을 자각했다.
그녀와의 대화가 자연스러워졌고,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가 없는 날이면 이유 없이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저녁, 수경이 카페를 나서려다 걸음을 멈췄다.
“서지훈 씨.”
그가 뒤돌아보았다.
“네?”
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쉬는 날에는 뭐 하세요?”
지훈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했다.
“글쎄요. 주로 집에서 책을 읽거나 요리를 하죠.”
그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도 하세요?”
“네. 혼자 사니까 직접 해 먹어야죠.”
그의 대답에 수경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그럼, 나중에 한 번 요리해 주실래요?”
지훈은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피식 웃었다.
“제가요?”
“네. 제가 서지훈 씨 추천 커피를 믿었던 것처럼,
서지훈 씨 요리 실력도 한 번 믿어볼게요.”
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좋아요.”
수경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말요?”
“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녀는 기뻐하며 웃었고, 지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수경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지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때때로 그의 작은 행동이 동우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는 지금 누구를 향해 있는 걸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는 더 이상 지훈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역시도 점점 그녀를 가까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