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이 감도는 전장.
붉은 하늘 아래, 불타는 깃발들이 휘날렸다.
전투가 끝난 뒤의 공기는 항상 비릿한 냄새로 가득했다.
말 위에 앉아 있던 황제, 시엘 아르카디아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눈앞에는 적국의 왕세자, 레온 카르딘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모습, 한쪽 눈썹 위로 흘러내리는 피가
그의 푸른 눈을 더 깊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 눈빛이었다.
패배한 왕세자의 눈빛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네가 바로 레온 카르딘인가.”
황제의 목소리는 낮고 위압적이었다.
주변의 장수들과 병사들은 숨을 죽였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전장에 나서 적국의 왕세자를
포로로 삼은 것은 역사상 드문 일이었다.
레온은 입술을 닦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황제께서 직접 날 잡으러 오셨나 보군.”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기죽지 않은 오만함과 조롱이 서려 있었다.
일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황제의 신하들이 황급히 레온을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시엘은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푸른 눈동자가 반짝이며 빛났다.
“황제께 감히 그런 태도를 보이는군.”
시엘은 말에서 내려 레온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턱을 붙잡아 위로 들게 했다.
레온은 반항하려 했지만, 손목이 뒤로 묶인 상태라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시엘은 레온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전장에서 잔혹한 투사의 모습을 보였다는 소문과 달리,
가까이서 보니 그 얼굴에는 귀족다운 기품이 서려 있었다.
이국적인 푸른 눈과 단정한 얼굴선,
그러나 그 속에 감춰진 야성이 눈에 띄었다.
“제법 흥미롭군.”
시엘이 중얼거렸다.
레온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흥미롭다고? 내 목이라도 가져가 보시지.”
“아쉽게도, 난 네 목을 원하지 않아.”
시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네 충성을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네가 죽기엔 아까운 자라는 것만은 확실하군.”
레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지?”
“네가 나를 이기지 못한 이상, 네 목숨은 내 손안에 있다.”
황제는 한 걸음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넌 단순한 포로가 아니다.
적국의 왕세자라면, 너의 존재는 내게 무기가 될 수도 있겠지.”
레온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날 인질로 삼겠다는 건가?”
시엘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내 곁에 두겠다는 뜻이다.”
그 순간, 레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황제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서며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레온 카르딘을 황궁으로 압송하라. 그의 신분은 이제부터 ‘황제의 포로’다.”
레온은 강제로 제국의 마차에 태워졌다.
손목에 묶인 족쇄가 차갑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제국군이 전장을 빠져나가며 승전가를 불렀다.
레온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자신의 왕궁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는 걸까.’
마차 안은 적막했다.
하지만 곧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혼자 두기엔 재미없을 것 같아서.”
시엘이 마차에 올랐다.
레온은 피식 웃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포로를 감시하는 것인가?”
“네 태도가 여전히 건방진 걸 보니, 고쳐줄 필요가 있겠군.”
시엘은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했다.
“네가 황궁에 도착하면, 내가 직접 가르쳐 줄 테니 기대해라.”
레온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날 길들일 수 없을 거다.”
그 말에 시엘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어디 한 번 해보지.”
마차가 천천히 제국의 수도를 향해 달렸다.
그것은 단순한 전리품 수송이 아니었다.
황제와 포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그러나 그 사이에는 아직 알지 못하는 감정의 불씨가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쉽게 꺼지지 않을 불길이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