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고급 레스토랑,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테이블에서 조용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이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코 한 여성, 소은이었다.
고급스러운 블랙 드레스를 차려입고, 자연스럽지만 세련된 웨이브가 더해진 머리카락,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단호한 눈빛.
그녀는 단순한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제는 세계적인 브랜드의 대표로 자리 잡은 성공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레스토랑 한쪽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강도윤.
몇 년이 흘렀어도 그는 여전히 날카로운 분위기와 완벽한 슈트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소은이 그를 본 순간 느낀 것은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의 눈빛 속에 담긴 깊은 감정이었다.
그 역시 변해 있었다.
과거보다 더 단단해진 사람.
그러나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그대로였다.
1. 재회
소은은 차분한 걸음으로 도윤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에요, 도윤 씨."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소은은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유로운 태도였지만, 사실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그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도윤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 빚을 갚으러 왔다
소은은 천천히 가방에서 한 장의 수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당신이 갚아준 빚, 이제 제가 갚으러 왔어요."
도윤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녀가 일부러 이런 형식적인 대화를 시작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빚’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때 당신이 저를 지켜줬죠. 이제 저도 당신에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도윤은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은은 그가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녀는 이미 결정한 상태였으니까.
3. 보고 싶었다
소은은 손끝으로 잔을 가만히 만지며 덧붙였다.
"그리고… 보고 싶었어요."
그녀의 솔직한 한 마디에 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몇 년 동안 숨겨왔던 감정을 담담하게 꺼내놓는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예전의 소은이 아니었다.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당당하게 표현할 줄 아는 여성이 되어 있었다.
도윤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를 보내고 난 후에도,
한 번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4. 두 번째 계약
"두 번째 계약을 하죠."
그녀의 농담 섞인 목소리에 도윤이 미간을 좁혔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이로."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그 정적 속에서,
도윤의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소은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계약이 아니라, 진짜 사랑으로 다시 시작해요."
5. 다시 함께하는 길
도윤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이번 계약 조건은 뭔가요?"
소은은 미소를 지었다.
"조건은 하나뿐이에요. 다시는 서로를 놓지 않을 것."
도윤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서로를 선택했다.
과거에는 계약으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이번에는 오직 사랑으로 이어질 관계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짜 사랑을 위한 두 번째 인생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1. 소은, 꿈을 이루다
파리의 가을은 유난히 낭만적이었다.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물들이고, 부드러운 바람이 오래된 건물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파리의 중심부, 마레 지구의 한 아뜰리에.
소은은 그곳에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키우며, 디자이너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그녀의 작업실은 늘 분주했다.
재봉사가 원단을 다듬고, 보조 디자이너들이 컬렉션 작업을 돕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직접 그린 드레스 스케치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소은, 이번 패션쇼 컬렉션이 드디어 메인 무대에 올라가게 됐어!”
비서인 리사 마리가 기쁜 표정으로 달려왔다.
소은은 살짝 미소 지으며 스케치를 넘겼다.
“그럼 일정 다시 한번 체크해야겠네요.”
“이제 정말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된 거야! 우리 브랜드도 엄청 유명해졌고!”
“아직 멀었어요.”
소은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눈빛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에 온 후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 노력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공의 기쁨 한편에는 늘 묵직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것이 꿈꿔온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마음속 한구석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밤늦게까지 작업을 마친 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넓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아파트.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그녀의 집은 완벽했지만, 유독 공허했다.
창가에 앉아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그녀는 문득 핸드폰을 들었다.
오랜만에 한국 뉴스를 검색했다.
"강도윤, 창립 3년 만에 기업 가치 1조 원 돌파"
소은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이름.
여전히 익숙한,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 먼 사람.
2. 도윤, 새로운 길을 걷다
서울의 밤,
강 회장의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난 지 몇 년이 흘렀다.
이제 도윤은 자신의 회사 ‘DY 그룹’을 성공적으로 키워내며,
기업가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최고층에 위치해 있었고,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비서가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오늘 투자 미팅이 3건 더 있습니다. 마감 전까지 검토하셔야 합니다.”
도윤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에 집중하며, 회사 성장에만 몰두했다.
강 회장의 회사를 떠나면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고,
이제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위치에 섰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문득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그리고 지키지 못한 사람.
회의를 마친 후, 도윤은 창가에 서서
멀리 서울 하늘을 바라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그녀의 이름을 검색할까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화면을 꺼버렸다.
그녀의 삶을 괜히 흔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가 행복한지조차 알 수 없는 게,
가장 힘들었다.
3. 두 사람, 서로를 떠올리다
파리
소은은 한밤중,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겠지.
가끔은 상상했다.
만약 그때 이별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아침이면 함께 식사를 하고,
퇴근 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미래를 꿈꾸는 그런 삶.
그러나 그건 허락되지 않은 꿈이었다.
그들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끝났으니까.
눈을 감으면,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러내릴까 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울
도윤은 혼자 사무실을 나섰다.
차를 몰아 익숙한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문득,
예전에 소은과 함께 갔던 카페 앞에 차를 세웠다.
문득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은이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웃던 얼굴.
그녀의 작은 손,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아 떠났다.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그녀를 다시 만날 용기가 있을까.
그러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소은은 조용히 자신의 짐을 정리했다.
작업실 한쪽에 놓여 있던 스케치북과 책들, 그리고 몇 벌 안 되는 옷들.
이곳에서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서랍을 정리하다가 손에 잡힌 작은 액자 속에는,
도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액자를 들었다.
도윤이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고,
그 옆에서 그녀가 미소 짓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감정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소은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그 사진을 서랍 깊숙이 넣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미련을 가져선 안 되니까.
그때, 집으로 돌아온 도윤이 거실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은은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도윤 씨, 저 짐 다 쌌어요."
도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여행 가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 감춰진 무언가가 느껴졌다.
소은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고 가려고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야겠죠."
그는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소은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 둘은 너무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를 위해 떠나려 한다.
서로를 위해 하는 선택인데도, 이렇게까지 아플 줄은 몰랐다.
"이제, 가볼게요."
소은은 조용히 돌아서서 문을 향했다. 도윤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붙잡고 싶었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그녀를 붙잡으면, 그녀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녀가 떠날 수 있도록 보내주는 것뿐이었다.
"……잘 지내요, 소은 씨."
도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소은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네, 도윤 씨도요."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공항의 대합실은 분주했다.
소은은 짐을 맡기고 비행기 티켓을 확인하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곧 비행기 탑승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도윤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이 그녀가 떠나는 날이라는 걸.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모를 허전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소은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도윤이었다.
그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은도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소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윤 씨."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다.
그녀가 떠나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소은은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천천히, 탑승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도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소은이 게이트를 지나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도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를 위해 떠난 두 사람의 첫 번째 사랑은, 그 자리에서 끝이 났다.
하지만, 정말로 끝난 것일까?
도윤은 멍하니 탑승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이륙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순간, 도윤은 처음으로 확신했다.
그녀가 없는 삶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공허할 것이라는 걸.
그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회사를 떠난 이유는 그녀였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결국,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공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도윤의 세계는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느꼈다.
이별이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이 사랑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 없다는 걸.
아침부터 집 안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소은은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녀는 요즘 온라인 뉴스나 기사들을 되도록 멀리하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불길한 기운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강도윤, 결혼 1년 만에 이혼… 아내와의 갈등 끝에 결별 선택"
"강도윤, 후계자 자리 포기 수순 밟나?"
"강 회장 측, '이혼은 개인적인 사유'… 기업 운영에는 영향 없어"
소은은 충격으로 휴대폰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도윤과 상의한 적도 없는 이혼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떨며 기사를 끝까지 읽었다.
내용은 터무니없었다.
"강 회장의 장남 강도윤이 아내와 별거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관계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오랜 갈등 끝에 결별을 선택했으며,
강 회장 역시 이혼을 존중한다고 전했다."
완전히 날조된 기사였다.
소은은 황급히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도윤은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도 방금 봤어요."
"이건… 우리랑 상의도 없이…"
"아버지 일이겠죠."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도윤 씨, 어떻게 할 거예요?"
소은의 목소리는 떨려 있었다.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를 만나야겠어요."
강 회장의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도윤은 평소와는 달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곧장 강 회장에게 다가가 책상 위에 신문을 던졌다.
"이게 뭐죠?"
강 회장은 태연한 얼굴로 신문을 집어 들고 제목을 훑었다.
"이혼 기사군."
그는 무심하게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너도 예상했을 텐데? 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이혼을 선택한 적 없습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지만, 그 안에 깃든 분노는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적도 없고, 소은 씨 역시 이런 결정을 내린 적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왜 멋대로 우리 인생을 조종하려 드는 겁니까?"
강 회장은 한숨을 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종이라… 넌 아직도 현실을 모르는군."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이미 결정된 일이야. 네가 받아들이든 아니든."
"대체 왜요?"
도윤이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게 결국 저를 후계자 자리에서 내리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강 회장은 조용히 웃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네가 포기하니까."
"……."
"너는 쉽게 회사를 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확실하게 만들어야 했어.
네가 더 이상 이곳에 미련을 두지 않도록."
강 회장은 도윤을 향해 다가섰다.
"이제 선택해라.
회사를 택할 거냐, 아니면 그 아이를 택할 거냐."
도윤은 조용히 웃었다.
"강 회장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강 회장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뭐라고?"
"우리 기업이 강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뭡니까?"
도윤은 한 걸음 다가서며 강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돈과 권력 때문입니까? 아니면 기업의 가치와 비전 때문입니까?"
강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금 오로지 '승계'만을 생각하고 계세요.
하지만 기업이란 건 단순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으로 운영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필요하고, 비전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신뢰가 필요합니다."
도윤은 차갑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가 하고 계신 일은, 이 회사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동이에요."
"……."
"사람들이 이 회사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
아들이 원하지도 않은 결혼을 강요하고,
그 결혼이 위협이 되니까 언론 플레이로 없애려고 한다면."
도윤은 천천히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강 회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결정?"
"이제 더 이상 이 싸움을 이어가지 않겠습니다."
도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회사를 떠나겠습니다."
강 회장의 표정이 단단하게 굳었다.
"뭐라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할게요."
도윤은 담담하게 말했다.
"후계자 자리, 포기하겠습니다."
강 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무언가를 다시 계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
"저를 내리고 싶어서 이 모든 걸 꾸미셨잖아요."
도윤은 냉정하게 웃었다.
"그럼 원하는 걸 얻으셨네요. 이제 더 이상 소은 씨를 건드릴 이유가 없겠죠?"
강 회장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윤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겁니다."
"……."
"제 방식대로 살아보려고요."
그는 마지막으로 강 회장을 노려보고, 천천히 돌아섰다.
강 회장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곱씹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윤은 그렇게 회사를 떠났다.
다음 날, 도윤은 소은이 출근한 후 강 회장을 찾아갔다.
"이제 정말 그만하시죠."
강 회장은 고개를 들며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만하라니, 무슨 말인가?"
도윤은 강 회장의 태연한 모습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공모전 논란, 언론 조작… 전부 아버지가 꾸민 일이잖아요. 이제 그만하시라고요."
강 회장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증거라도 있나 보지?"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했을 거라는 건 분명하니까요."
강 회장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넌 어쩔 작정이지? 계속 나한테 맞서겠다는 건가?"
"그 아이를 더 이상 건드리지 마세요.
아버지가 원하는 게 결국 제 후계자 자리에서의 퇴진이라면, 저와 직접 해결하세요.
애꿎은 사람을 희생시키지 말고요."
강 회장은 천천히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하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흥미롭군. 너도 이제 제대로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야.
그래, 네가 스스로 내려온다면 나도 굳이 불필요한 수를 쓸 필요는 없겠지."
도윤은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 아이는 네 인생에 필요 없는 존재야. 어차피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 아닌가?"
"……."
"네가 그 아이와 함께하는 한, 넌 이 회사에서 인정받을 수 없을 거다.
나는 오래전부터 후계자는 정해져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네가 이 자리를 놓지 않으려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네 약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거다."
도윤은 강 회장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소은 씨를 더 괴롭힐 생각이신가요?"
강 회장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사람들의 시선이 이미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나?
공모전 특혜 논란도 그렇고,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끊임없이 공격받을 거다."
"……."
"언론이 그녀를 계속 물고 늘어지면,
네가 아무리 막으려 해도 상처 입을 수밖에 없어. 그녀가 견딜 수 있을까?
아니, 네가 그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도윤은 강 회장을 노려보았다.
"결국 원하는 게 뭐죠?"
"네가 이 회사를 떠나겠다고 하면, 그 아이를 건드릴 이유가 없어진다는 거다. 단순한 거래지."
도윤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강 회장은 이미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히 찔러오고 있었다.
그는 단순히 후계자 자리를 걸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소은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강 회장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는 점점 더 힘들어질 거다.
네가 감정을 앞세우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나?"
도윤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이 싸움을 어떻게든 끝내야 했다.
그러나 그 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윤은 강 회장의 사무실을 나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강 회장의 말대로라면, 소은이 계속해서 상처받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 때문이었다.
그가 아무리 소은을 지키려고 해도,
강 회장의 영향력과 언론의 관심 속에서 그녀를 온전히 보호하기란 불가능했다.
소은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떠난다고 해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차로 돌아온 도윤은 핸들을 잡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선택에 따라 소은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었다.
지금 당장 그녀를 지키려 한다면 더 깊은 늪에 빠질 것이고,
거리를 두면 그녀가 상처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는 순간, 그는 그녀를 완전히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 도윤은 집으로 돌아와 소은을 찾았다.
그녀는 거실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새로운 디자인 스케치들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손놀림이 매끄럽지 않았다.
그녀가 고민하고 있다는 게 단번에 보였다.
도윤은 조용히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학교는 어땠어요?"
소은은 펜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
"괜찮았어요."
그러나 도윤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짓말."
그녀는 피식 웃었다.
"티가 났나요?"
"많이요."
소은은 잠시 침묵하다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힘들어요."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막상 마주하면 쉽지 않네요.
저 혼자 괜찮다고 생각해봤자, 계속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흔들려요."
도윤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소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 모든 게 저 혼자 감당하기엔 벅차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도윤은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소은 씨."
그녀가 도윤을 바라보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말해요."
소은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건 제 문제니까요. 제가 해결해야 해요."
도윤은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며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제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소은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떠나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함께 싸울 것인지.
며칠 후, 강 회장은 언론을 통해 또 한 번 압박을 가했다.
소은이 수상한 공모전 주최 측과의 연관성을 언급하며,
익명의 제보자가 ‘특혜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기사를 냈다.
또다시 인터넷과 뉴스는 이 논란으로 떠들썩했다.
공모전 주최 측은 ‘심사는 철저하게 진행되었으며, 외부 개입은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은 이미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있었다.
소은은 작업실에서 뉴스를 보고 손을 떨었다.
이제는 그냥 지나가는 루머가 아니었다.
그녀의 미래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도윤이었다.
소은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
"도윤 씨…"
"괜찮아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도윤은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늘 강한 척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상처받고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은 씨."
"네…"
"내일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소은은 당황한 듯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우리,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너무 지쳐서 깊게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알겠어요. 내일 봐요."
전화를 끊은 후, 도윤은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소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조용히 강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강 회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좋은 선택이다."
그렇게, 도윤은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 선택이, 오히려 서로를 더 깊은 상처로 몰아넣게 될 거라는 것을.
소은은 강의실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평소처럼 강의에 들어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요즘 들어 캠퍼스가 낯설게 느껴졌다.
공모전 수상 이후,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익숙했던 동기들의 시선은 이제 의심과 경계로 가득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몇몇 학생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모른 척하고 지나쳤겠지만, 오늘따라 그 말들이 유난히 귀에 박혔다.
"결국 강도윤의 아내라서 된 거 아냐?"
"그러게, 우리 같은 일반 학생이랑은 비교가 안 되지."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야?"
소은은 그 말들이 모두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걸음을 옮겼다.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쳤지만,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평소 자주 어울리던 동기들이 그녀를 슬쩍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다가가려 하면 어색한 미소를 짓거나, 말을 돌렸다.
공모전이 발표되던 날만 해도 축하해주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논란이 커지면서 그들의 태도도 변해갔다.
그중 한 명인 유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소은아,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소은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복도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진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정말 널 축하해주고 싶었어. 근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도 기회가 있었던 거잖아.”
소은은 유진의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근데 네가 강도윤 씨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아무래도 우린 비교조차 안 되는 거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공정한 경쟁이었을까?”
그 말이 끝나자, 소은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가 정말 실력으로 붙은 거라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 거야.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네가 너무 부러워.”
유진의 말은 원망이라기보다는 솔직한 감정 토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말이 소은에게는 더 큰 무게로 다가왔다.
"너는 취업 걱정할 필요 없잖아. 어차피 강도윤 씨가 있잖아. 우리랑은 다르니까."
그 말이 결정타였다.
소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취업이 어려운 현실에서, 그녀만은 걱정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아무런 노력 없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진아, 나도 열심히 했어."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도윤 씨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고,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오고 싶었어."
유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안 봐. 미안해,
나도 기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솔직한 감정을 말한 거야."
소은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해해."
그녀는 정말로 유진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윤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소은이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윤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신경 쓰이는 게 분명했다.
“말해요.”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공모전 때문에 학교에서 조금… 복잡한 일이 있었어요.”
도윤은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가 뭐라고 했어요?”
그의 목소리가 단호해지자, 소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럴만한 상황이었어요.”
도윤은 그녀의 반응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소은은 "이건 내 문제예요."라며 거리를 두었다.
도윤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혼자 해결할 필요 없어요. 나도 함께할 수 있어요."
소은은 애써 미소 지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무거운 감정이 남아 있었다.
소은은 홀로 작업실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새하얀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지만, 손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해도,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들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억울하다는 감정보다 허탈함에 가까웠다.
분명 모든 과정을 정당하게 거쳤다.
남들보다 더 노력했고, 밤을 새워가며 디자인을 다듬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노력보다 그녀의 배경을 먼저 보았다.
"강도윤의 아내니까 당연히 수상했겠지."
"우리는 시작부터 비교도 안 되는 상대였던 거야."
그런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처음엔 무시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를 짓누르는 듯했다.
소은은 손끝으로 스케치북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문질렀다.
디자인을 구상할 때면 늘 가슴이 뛰었고, 스케치를 완성할 때면 성취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퍼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작게 내뱉은 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지만,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머릿속이 복잡할수록 손끝이 무거워졌다.
다시 펜을 잡아야 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그리고 싶지 않았다.
공모전 최종 발표 이후, 소은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심사위원단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그녀의 디자인을 선정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터넷과 SNS에서는 끊임없이 그녀를 둘러싼 루머와 비난이 오갔다.
"재벌가 며느리가 무슨 공모전이야. 그냥 디자이너 브랜드 하나 차려서 하면 되지 않아?"
"진짜 실력으로 뽑힌 게 맞을까? 심사위원들도 다 재벌과 연관 있는 사람들이던데?"
"그동안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은 뭐가 되지?"
익명의 댓글들은 독처럼 그녀를 잠식했다.
익명성 뒤에 숨어 마구 쏟아내는 독설들이,
노력해서 얻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날도 소은은 작업실에서 홀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연필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음에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말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있었다.
그녀는 작업 중이던 디자인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작업실 문이 열렸다.
"또 기사가 떴나요?"
도윤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화면을 확인하곤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소은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노력해서 얻은 결과였는데, 이제는 그냥 ‘특혜’라고만 여겨져요.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 해도, 모두가 그렇게 믿어버리면…"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반박하면 되잖아요. 정당하게 받은 결과라고 당당하게 말해야죠."
도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소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조차도 이 수상이 기쁜 일이 아니게 돼버렸어요."
도윤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감싸주고 싶어도, 그녀가 견뎌야 하는 감정까지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도윤은 강 회장을 찾아갔다.
"그만하세요."
강 회장은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도윤을 바라보았다.
“뭘 그만하라는 거냐?”
“그 아이를 건드리는 거 말입니다. 공모전 논란, 언론 조작, 다 아버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잖아요.”
강 회장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증거라도 있나?”
“없다고 생각하세요?”
도윤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미 알아볼 건 다 알아봤어요.
아버지가 언론사 몇 군데를 압박해서 이슈를 키운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죠.”
강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윤 앞까지 걸어왔다.
“그래서, 어쩔 건데? 네가 이 일에 개입해서 뭐라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소은 씨를 계속 괴롭히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강 회장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도 알잖아? 네가 아무리 움직여도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소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사람들은 진실보다 자극적인 이야기를 믿는 법이지.”
도윤은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저는 이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를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강 회장의 눈빛이 순간 변했다.
“그래, 이제야 본심이 나오는구나.”
강 회장은 피식 웃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럼, 더 이상 이 싸움에서 이길 생각은 하지 마라.”
도윤이 눈살을 찌푸리자, 강 회장은 서류를 정리하며 조용히 덧붙였다.
"회사는 감정으로 운영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올바른 후계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지.
인사는 단순한 개인 감정으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거다."
그는 도윤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넌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있나? 이 회사를 네가 이끌어야 하는 이유를."
도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는 강 회장의 비열한 방식이 불쾌했지만, 동시에 그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 회장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댔다.
“그러니 선택해라. 회사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도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강 회장이 원하는 건 결국 자신이 스스로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소은을 이용하고 있었다. 도윤은 이를 막아야 했다.
그날 밤, 도윤은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소은은 여전히 책상 앞에서 스케치를 보고 있었지만,
이전과 달리 연필을 쥔 손이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저녁 안 먹었죠?" 도윤이 물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어서요."
도윤은 한숨을 쉬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간단한 샌드위치를 가져와 그녀 앞에 놓았다.
"적어도 이거라도 먹어요."
소은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녀는 천천히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처음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도윤은 그녀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결심했다.
강 회장이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는 소은을 지켜야 했다.
소은은 아침부터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공모전 최종 결과 발표가 있던 날 이후로
인터넷에서는 ‘강도윤 아내 특혜 논란’이라는 기사들이 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루머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와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점점 강한 어조로
소은을 비난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공정한 경쟁이 맞긴 한 건가요?
재벌가 며느리라는 게 알려진 순간부터 이미 판이 기울어진 거 아닌가요?"
"다른 사람들은 취업 걱정하면서 공모전 하나하나 절박하게 준비하는데,
누구는 ‘빽’으로 쉽게 성공하네요."
처음엔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논란은 더 커졌고,
심지어 몇몇 온라인 기사에서는
공모전 주최 측에 강도윤이 압력을 넣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소문까지 퍼졌다.
소은은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그녀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불안한 손끝이 살짝 떨렸다.
"무슨 일이에요?"
도윤이 거실을 지나가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다가왔다.
소은은 망설이다가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도윤은 화면을 읽고는 굳은 표정이 되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사들이 왜..."
그는 화면을 넘기며 기사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대다수의 기사들은 신빙성 없는 루머를 그대로 가져다 쓰며
‘강도윤의 영향력’이라는 표현을 덧붙이고 있었다.
"이거, 명백히 조작된 기사입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분노가 묻어나왔다.
"아버지겠죠. 또다시 나를 압박하려는 수단으로 소은 씨를 이용하는 거예요."
소은은 그의 말을 듣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강 회장이 정말 이런 기사들을 조작한 걸까?
하지만 단순한 루머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타이밍도 절묘했다.
"도윤 씨가 막을 방법은 없나요?"
소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 언론사에 압박을 가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거예요.
이미 사람들은 ‘숨기는 게 있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으니까.
괜히 손을 대면 더 크게 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냥 두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요?"
"아니요. 누가 이런 기사를 퍼뜨렸는지 추적할 거예요.
분명히 아버지의 손이 닿았겠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도윤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전화가 끝난 뒤, 그는 소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일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날 오후, 강 회장은 고급 호텔 라운지에서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고,
그는 잔을 천천히 들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윤이 도착하자마자 강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
"본론부터 말하죠. 이 기사, 아버지가 조작한 거죠?"
도윤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강 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기사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거다.
그리고 보니, 네가 요즘 꽤 주목받고 있더군.
‘이사회에서도 후계자로 적합하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래서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도윤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강 회장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도윤아, 넌 원래 이런 자리에는 관심 없었잖아.
그런데 결혼 후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졌지? 네가 책임감 있는 남자처럼 보이니까.
네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사회 멤버들도 생겼고.
네 인기가 올라가는 게 내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단 말이다."
"결국, 저를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게 목적이군요."
강 회장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원래 원하지 않던 자리잖아. 네가 후계자에서 자연스럽게 내려온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방해할 이유가 없지. 그 아이도 마찬가지고."
"협박이네요."
"협박이라기보단 조언이다. 네가 원하지도 않는 싸움을 하지 말라는 거야.
너도 알잖아? 네가 버티면 버틸수록, 그 여자아이가 더 많은 걸 감당해야 할 거라는 걸."
도윤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강 회장은 상황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고집을 부리면 또다시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걸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럼 잘 생각해봐라."
강 회장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도윤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소은은 작업실에서 디자인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돌아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지만,
평소와 달리 어두운 표정을 한 그를 보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소은은 천천히 다가가 그의 곁에 섰다.
"강 회장님을 만나고 오셨죠?"
그녀의 조용한 질문에 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내가 계속 버틴다면, 아버지는 당신을 더 힘들게 할 겁니다."
소은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윤이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포기할 거예요?"
도윤은 대답 대신 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지 말라는 간절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도윤은 깨달았다.
소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 싸움을 멈춰야 한다는걸…
퇴근 후 도윤은 무심코 차를 몰고 가던 중, 낯익은 거리에 다다랐다.
시선을 돌리자 한적한 골목 끝에 자리한 작은 공원이 보였다.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울리는 듯한 기분에, 그는 차를 멈추고 천천히 문을 열고 내렸다.
그곳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자주 오던 공원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들이지 않았던 곳.
그런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곳으로 끌려왔다.
공원 한쪽에 놓인 낡은 벤치. 어릴 적 어머니가 늘 앉아 있던 자리였다.
도윤은 그곳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어머니라면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하셨을까.’
소은과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공모전에서 수상한 그녀의 환한 미소, 자신을 향해 건네던 감사의 말들.
그리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모습까지.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스스로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질투라도 하는 건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자신이 놀랐다.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그녀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묘한 상실감을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도윤은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가까운 바를 찾았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지만, 잔을 기울일수록 과거의 기억들이 또렷해졌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꿋꿋이 감내하며 살던 모습.
그리고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손길.
그런 어머니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술잔을 몇 번이나 비웠는지 모를 정도로 마신 후, 그는 결국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소은이 아직 깨어 있는 듯했다.
도윤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휘청였다.
그 순간, 깜짝 놀란 소은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도윤 씨, 괜찮아요?”
술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고,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술을 이렇게 많이 마시고 오면 어떡해요.”
소은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도윤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경 쓰지 마요.”
힘없이 대꾸한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은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주방으로 가 물 한 잔을 가져왔다.
“이거라도 마시고 주무세요.”
도윤은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기대고 싶은 무언가를 찾은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물을 한 모금 삼키고 나직이 말했다.
“어머니와 자주 갔던 곳이 있어요.”
소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오늘… 우연히 그곳에 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인데… 그곳에 가니까,
내가 얼마나 한심한 놈인지 깨닫게 되더군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나직했다.
“나는 늘 어머니를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소은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강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사실 그 안에는 깊은 외로움과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도윤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도윤은 작게 웃었다.
“당신은 그렇게 말하겠죠. 하지만, 난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 같아요.”
소은은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었지만,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그때, 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소은 씨…”
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였지만, 정신은 또렷해 보였다.
소은은 숨을 삼켰다.
그의 눈빛은, 마치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했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부드러운 키스였다.
깊이 파고들지도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천천히 다가온 순간이었다.
소은은 순간적으로 멈춰버렸다.
도윤의 온기가 가까워지는 것이 실감 났고,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던 감정들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키스가 끝난 후, 도윤은 이내 천천히 몸을 물렸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한 행동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안합니다.”
그는 짧게 말했다.
소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
그가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어지러운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소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도윤은 조금 늦게 일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무엇보다도, 어젯밤의 일이 뚜렷이 기억났다.
그는 천천히 거실로 나왔다.
소은이 주방에서 조용히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제와는 다른 차가운 담담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소은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술김에 저지른 실수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도윤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그렇게 오해해 주는 것이 편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맞는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소은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그날 밤의 기억은 누구에게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공모전 최종 발표일,
소은은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표가 이루어지는 단상 위에는 공모전 관계자가 서 있었고,
마이크 너머로 지원자들의 닉네임이 하나씩 불려졌다.
그녀의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럼 지금부터 최종 합격자를 발표하겠습니다.”
관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결과를 기다렸다.
“최종 합격자는—— 닉네임 ‘Luna’입니다!”
순간,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시간마저 멈춘 것 같았다.
소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무대를 바라봤다.
닉네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주변에서 터지는 박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옆에 있던 동기가 팔을 흔들며 말했다.
“소은아, 네 닉네임 맞잖아! 어서 올라가!”
그제야 그녀는 떨리는 다리로 단상으로 향했다.
심사위원이 트로피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
“축하합니다. ‘Luna’라는 이름으로 제출하신 디자인은 심사위원단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트로피를 손에 쥐는 순간, 소은은 이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이 이뤄낸 성과였다.
공모전 발표 후, 도윤은 바쁜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관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소은이 귀가한 듯했다. 그녀는 손에 트로피를 들고 있었고,
표정에는 아직도 기쁨과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보였다.
도윤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축하드립니다.”
소은은 그를 보자마자 멈칫했다.
도윤이 먼저 축하한다는 말을 건넨 것이 처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금 쑥스러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그럴 만하죠.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었으니까요.”
그의 말에 소은은 순간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계약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그녀의 꿈을 존중해 주었다.
도윤은 그녀의 손에 들린 트로피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 트로피, 잘 어울리네요. 원래부터 당신 것이었던 것처럼요.”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웃었다.
도윤은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작은 상자였다.
"이건 뭐예요?"
"수상 축하 선물입니다."
소은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고급스러운 펜이 들어 있었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필요한 도구는 펜이겠죠.”
소은은 감동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거, 정말 감사해요. 이런 선물까지 받을 줄은 몰랐어요."
"당신이 계속 그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소은의 동기들은 그녀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이건 당연히 축하해야죠!”
친구들이 한마디씩 거들며 그녀를 설득했고, 소은도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파티는 도심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열렸다.
그녀는 축하를 받으며 동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우연히, 도윤이 업무를 마치고 지나가던 길에 레스토랑 창가에 앉아 있는 소은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동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한 남자와 유독 가깝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윤은 차를 세우고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소은과 다정하게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그녀도 편안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고정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건 단순한 감정일까? 아니면… 질투?
아니, 그는 질투할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다른 남자와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마치 그녀가 점점 자신의 세계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도윤은 조용한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점점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하는 걸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익숙해진 관계가 깨질까 두려운 걸까.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원래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 있는 순간부터 그녀는 재벌가의 복잡한 환경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녀의 미래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고민했다.
소은은 밤늦게 귀가했다. 도윤이 아직 거실에서 깨어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도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소은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친구들이 축하해줘서 조금 늦었어요.”
"그래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다.
소은은 그가 평소보다 말을 아끼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우리는 계약 관계 아닌가.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그녀가 신경 쓸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무거웠다.
소은은 기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공모전은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기회였고,
오롯이 자신의 실력으로 도전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특혜’라는 단어 하나로 그녀의 모든 노력이 의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기자의 질문이 쏟아질수록, 그녀는 점점 더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도윤이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만하시죠.”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명확한 경고였다.
기자는 순간 움찔했지만, 여전히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노트를 펼치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강 대표님, 지금 공식 입장을 발표하시는 겁니까?
배우자의 공모전 참여가 특혜라는 논란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도윤은 흔들림 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아내는 공모전에 정당하게 참가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지원자의 신원을 알지 못한 채 작품만으로 심사했고,
저 또한 그녀의 참여 여부조차 나중에 알았습니다.”
기자는 다시 물었다.
“하지만 강 대표님께서 후원하는 기업 중 하나가 해당 공모전의 스폰서라고 하던데요?”
소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녀조차 몰랐던 사실이었다.
도윤은 피식 웃었다.
“그 기업은 아버지가 직접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번 공모전의 후원사들은 심사 과정에 전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심사 과정이 보다 공정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기자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논란이 커지고 있는 만큼,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보다 투명한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도윤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공모전 운영진 측과 논의해 심사 방식을 바꾸겠습니다.
2차 심사는 1차 합격자들만 익명 혹은 닉네임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소은은 놀란 눈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기자 또한 예상하지 못한 결정에 순간 멈칫했다.
"그렇게까지 하시겠다는 겁니까?"
"공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요."
도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답했다.
기자는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어진 듯 보였다.
그날 저녁, 소은은 조용히 창가에 서서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늘 벌어진 일을 곱씹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도윤이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는 것은 알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싶었다.
도윤은 거실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생각이 많아 보이네요."
소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나 하나 때문에…."
도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은씨 하나 때문이 아니라, 이게 옳은 일이니까요."
그녀는 그의 대답에 순간 말을 잃었다.
"그냥 두면, 당신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평가받게 될 겁니다. 난 그게 싫어요."
소은은 그를 바라보았다.
계약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지켜야 할 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도윤은 마치 그런 틀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냥 하는 겁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소은은 그의 옆모습을 보며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며칠 후, 공모전 운영진 측에서는 공식 발표를 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특정 참가자의 신원 문제와 관련하여,
2차 심사는 익명 및 닉네임 기반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모든 지원자는 동일한 조건에서 평가받으며,
심사위원단은 최종 발표 전까지 참가자의 신원을 알지 못하도록 시스템을 변경하였습니다."
이 발표가 나간 후, 특혜 논란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이번 논란을 계기로 공모전의 공정성이 더욱 강조되었고,
여론도 점차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소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도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다시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도윤은 짧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당신이 할 일만 남았네요."
소은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최선을 다할게요."
그녀는 더 이상 이 공모전을 계약 결혼을 둘러싼 논란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정말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일 차례였다.
그날 밤, 소은은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실에 앉아 디자인을 수정했다.
그녀는 손끝에서 펼쳐지는 선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을 때의 열정을 다시 되찾고 있었다.
도윤은 거실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자신이 그녀를 돕고 싶었던 이유를 곱씹었다.
그것이 단순히 계약 관계에서 비롯된 의무감이었을까.
아니면, 그 이상이었을까.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젠가,
두 사람의 관계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그런 자신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소은은 인터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긴장된 아침을 맞았다.
공모전 준비로 지친 몸을 이끌고 인터뷰 장소로 가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도윤과 부부다운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도윤은 그런 그녀의 불안을 눈치챘는지 차 안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요. 그냥 편하게 대답하면 돼요.”
소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편하게 대답하는 게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도윤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도 이런 자리가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강 회장의 압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인터뷰 장소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유명 잡지사에서 기획한 부부 인터뷰였다.
강 회장의 뜻에 따라 진행된 자리였고, 두 사람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해야 했다.
기자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결혼 후 생활은 어떠신가요? 함께 지내면서 변화된 점이 있나요?”
소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익숙해지는 중이에요. 혼자 지낼 때와는 다르게 누군가와 함께하는 생활이 처음이라…
작은 부분에서도 차이가 많이 나더라고요.”
도윤이 옆에서 덧붙였다.
“서로의 생활 패턴이 다르다 보니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하지만 그만큼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소은은 순간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기자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이 서로를 배려하며 살아가고 계신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혹시 서로가 가장 고마웠던 순간이 있을까요?”
소은은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최근 도윤이 야근하고 돌아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얼마 전, 도윤 씨가 바쁜 와중에도 저를 챙겨줬어요.
공모전 준비 때문에 피곤할 텐데도 잊지 않고 물을 건네주고,
작업실을 찾아와 조용히 응원해 줬어요.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작은 배려가 큰 힘이 되더라고요.”
도윤은 소은의 말을 듣고 살짝 놀란 듯했다.
그저 자연스럽게 한 행동이었는데, 그녀에게는 그렇게 다가갔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그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은 씨도 저를 많이 신경 써 줍니다.
바쁜 와중에도 저녁을 챙겨 주고, 저보다 먼저 잠들지 않고 기다려 주기도 하죠.
집에 돌아왔을 때 환한 불빛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이상하게 안심이 되더라고요.”
소은은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계약 결혼이라는 것을 잊어야 하는 자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이 진심처럼 들렸다.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기자는 만족한 표정으로 질문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도윤은 자연스럽게 소은의 어깨를 감싸며 가까이 다가갔다.
기자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소은은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곧 그에게 맞춰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소은은 긴장이 풀렸는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무난했던 것 같아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어요. 소은씨 덕분에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었어요.”
그의 말에 소은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녀는 도윤이 진짜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계약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가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순간, 강 회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깊이 파고들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날 저녁, 강 회장은 비서를 불러 두 사람의 인터뷰 영상을 다시 확인했다.
영상 속에서 두 사람은 완벽한 부부처럼 보였지만, 그는 쉽게 믿지 않았다.
“겉보기엔 좋아 보이지만…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군.”
강 회장은 서류를 뒤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인터뷰로 모든 의심이 사라질 리 없었다.
그는 여전히 도윤의 행동을 면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며칠 후, 소은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디자인 공모전 1차 합격이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메일을 확인했다.
“합격… 했어.”
기쁨에 들뜬 그녀는 바로 도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그는 바쁜 일정 중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사이, 도윤의 새어머니가 그녀를 방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소은의 공모전 지원 정보를 우연히 접한 새어머니는 그녀의 배경을 조사했다.
평범한 디자이너 지망생이 강도윤의 아내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논란이 될 여지가 충분했다.
그녀는 몇몇 언론사에 은밀히 정보를 흘렸다.
‘강도윤의 아내, 공모전 참가도 특혜인가?’라는 의혹이 돌기 시작했다.
소은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공모전 준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도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뜻과 달리, 상황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은의 작업실 앞에서 낯선 기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소은 씨, 잠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강도윤 대표님의 아내라는 점이 공모전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소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그녀는 공모전에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지원했고,
특혜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기자의 질문은 이미 단정적인 뉘앙스를 띄고 있었다.
그 순간, 뒤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하시죠.”
도윤이었다.
소은은 공모전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디자인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책상 위에는 다양한 스케치와 원단 샘플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펜을 쥔 채 디자인을 수정하다가 시계를 힐끗 보았다.
어느새 밤 열한 시가 넘었다.
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이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거실을 지나 작업실로 향했다.
문을 살짝 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작업 중이에요?"
소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작업실에 들러 안부를 묻곤 했다.
"네, 마감이 얼마 안 남아서요."
도윤은 책상 위의 스케치들을 바라보았다.
지난번보다 더 정교해진 디자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 컬렉션이라는 주제에 맞게 다양한 색감과 스타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계속 이렇게 밤을 새우면 몸 상해요."
소은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도윤은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물이라도 마시면서 해요."
소은은 그가 조용히 챙겨주는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처음 계약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제는 마치 자연스럽게 서로를 신경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이제 조금만 더 하고 잘게요."
도윤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힌 후에도 소은은 한동안 그가 건넨 물병을 바라보았다.
계약 관계임을 잊지 않으려 했지만, 점점 일상이 뒤섞이고 있었다.
강 회장은 최근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관심도 줄어들고, 기업 이미지 상승 효과도 점차 약해지는 듯했다.
그는 비서를 통해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도윤, 요즘 너무 조용하군."
강 회장은 도윤을 서재로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를 마주했다.
"별일 없습니다."
"별일 없긴. 네가 결혼을 했으면 좀 더 자연스럽게 보여야 하는데,
언론에서는 너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
사람들이 점점 흥미를 잃고 있다."
강 회장은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도윤을 노려보았다.
"우연히라도 좋으니, 함께 있는 사진이 나올 수 있도록 해.
사람들이 네 결혼을 진짜라고 믿게 말이야."
도윤은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는 이 결혼을 이용해 기업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도윤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여전히 불쾌했다.
"알겠습니다."
그는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며칠 후, 도윤은 소은에게 저녁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공모전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오늘은 좀 쉬는 게 어때요?"
도윤이 말했다.
소은은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두 사람은 도윤이 예약한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분위기 좋은 창가 자리에 앉자마자, 몇몇 기자들이 슬쩍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이거… 혹시 일부러 기자들을 부른 거예요?"
소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윤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우리 관계를 의심하고 계세요. 우리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소은은 그의 의도를 이해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계약 관계지만, 이런 식으로 공개적인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도윤은 기자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소은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불편함이 스며 있었고,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그녀도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그의 연기에 동참했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도윤은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신경 써서 골랐다.
둘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서자, 몇몇 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도윤은 자연스럽게 소은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보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긴장했지만, 그가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손길이 어색하지 않았다.
다음 날, 언론에는 두 사람의 저녁 식사 사진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여전히 달콤한 신혼생활'이라는 제목과 함께,
도윤이 소은을 다정하게 챙기는 모습이 기사화되었다.
강 회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기업 이미지는 다시 상승했다.
그러나 소은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계약이지만, 이 모든 것이 점점 현실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거래라고 생각했지만,
도윤이 보여주는 작은 배려와 다정함이 가끔은 그녀를 흔들리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소은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도윤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의 야근이 잦아졌고, 식사를 거르고 오는 날도 많았다.
처음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며칠 전 그가 피곤한 얼굴로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쓰러지는 모습을 본 후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재료들을 하나둘 꺼냈다.
간단한 된장국과 반찬 몇 가지, 그리고 따뜻한 밥 한 공기.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집밥 같은 따뜻한 음식을 준비하고 싶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식사만큼은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국을 덜어놓고 있을 때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은이 고개를 들었다.
도윤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들어왔다.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고,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재킷을 벗었다.
그녀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야근이 계속되시길래, 그냥 가볍게 저녁 준비했어요.”
소은은 자연스럽게 상을 차리며 말했다.
도윤은 식탁을 바라보며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부러 기다린 거예요?”
“그냥… 피곤하실 것 같아서요.”
그는 한순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이내 조용히 의자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밥을 한술 뜨고 국을 맛본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요.”
소은은 안도하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급하게 만든 거라 맛이 괜찮을까 걱정했어요.”
“괜찮아요. 집밥 같은 느낌이네요.”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도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식사는 천천히 이어졌다.
소은은 그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고,
도윤도 무심히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도윤이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소은은 간단한 저녁을 준비했다.
처음엔 별말 없이 먹던 도윤도 점점 자연스럽게
그녀가 차린 음식을 받아들였고, 가끔씩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도윤이 식사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물었다.
“요즘 작업은 어때요?”
소은은 놀란 듯 잠시 멈칫했다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디자인 공모전에 지원했어요.
가을 패션 컬렉션 콘셉트인데, 자연과 조화를 주제로 작업하고 있어요.”
도윤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패션 공모전?”
“네. 올해 트렌드인 따뜻한 색감과 레이어드를 활용해서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표현하려고 해요.
디테일을 살리는 게 중요해서 조금 고민 중이지만, 그래도 재미있어요.”
소은은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도윤은 그녀의 모습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하던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이렇게 생기 넘치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직접 디자인한 걸 볼 수 있을까요?”
소은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작업실에 가면 스케치가 있어요.”
둘은 자연스럽게 작업실로 향했다.
소은이 책상 위에 놓인 스케치북을 펼치자,
섬세한 선들로 이루어진 컬렉션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톤의 색감이 강조된 의상들이 독특한 감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도윤은 조용히 그림을 바라보았다.
한 장, 두 장 넘길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느껴졌다.
“정말 정교하네요.”
“그렇게 보이세요?”
“네. 디자인을 잘 알진 못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 있어요.”
소은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도윤이 이런 칭찬을 건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디테일이 많네요. 옷 디자인이 단순한 줄 알았는데.”
“작은 요소들이 모여야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성돼요. 특히 소재나 패턴이 중요해서….”
소은은 도윤이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것이 신기했다.
보통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감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는 예상 외로 세세한 부분을 짚었다.
“공모전, 잘될 것 같아요.”
그의 말에 소은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날 밤, 소은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도윤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가 그 맞은편에 앉았다.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요즘 야근도 많고, 피곤해 보이세요.”
도윤은 피식 웃으며 노트북을 덮었다.
“그러게요. 요즘 정신이 없긴 하죠.”
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드셨으면 해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약 관계로 시작했지만, 그녀는 점점 그의 일상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일상은 더욱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여전히 계약이란 틀 안에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작은 배려들이 쌓이고 있었다.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소은은 새벽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익숙하지 않은 침실의 천장을 바라보며,
여기가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도윤과의 계약 결혼 후, 이곳은 그녀의 새로운 집이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집안 풍경이 펼쳐졌다.
조용한 부엌 쪽에서 가볍게 들려오는 소리가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일어났어요?”
도윤의 차분한 목소리가 부엌 쪽에서 들렸다.
그가 고개를 돌려 소은을 바라봤다.
셔츠 소매를 깔끔하게 접어 올린 모습은 딱딱하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
“네. 아침부터 준비하셨네요.”
소은은 조심스레 부엌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식탁 위에는 깔끔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과일, 그리고 갓 내린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간단한 거예요. 평소처럼 아침을 먹는 거라 특별할 건 없어요.”
도윤은 무심한 듯 말했지만, 신경 써서 준비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소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괜찮은데요.”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이상, 서로 불편하지 않은 게 중요하잖아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도윤은 커피 잔을 그녀 앞에 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소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잔을 들었다.
따뜻한 향이 그녀를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도윤의 손길이 닿은 식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심한 듯 행동했지만,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며칠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소은은 서서히 이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고,
도윤 또한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는 것이 자연스러워졌고, 퇴근 후에도 가벼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소은은 도윤이 아직 사무실에서 돌아오지 않은 틈을 타 부엌에서
새로운 요리를 시도했다.
그동안은 간단한 식사만 했지만, 오늘은 정성껏 요리를 해보고 싶었다.
그녀는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가며 조심스럽게 음식을 만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갓 조리한 크림 파스타와 신선한 샐러드가 놓였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소은이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냥, 오늘은 제가 요리를 하고 싶어서요. 피곤하실 것 같아서 간단한 저녁을 준비했어요.”
도윤은 놀란 듯 그녀가 준비한 식탁을 바라보았다.
그는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음식을 한 입 맛보았다.
“맛있네요.”
소은은 긴장이 풀리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처음 만들어 본 요리인데 괜찮을까 걱정했어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맛있어요.”
도윤은 솔직하게 평가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식사가 끝난 후, 도윤은 설거지를 도우며 자연스럽게 소은과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가볍게 주고받았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늦은 밤, 거실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일도 생겼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도윤은 업무가 끝난 후에도 종종 소은의 작업실에 들러 그녀의 디자인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건 어떤 컨셉인가요?”
“봄을 테마로 한 웨딩드레스예요. 따뜻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만든 드레스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 같아요.”
그의 말에 소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무심코 도윤의 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날 밤, 도윤은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소은은 차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
“커피보다는 차가 좋을 것 같아서요.”
도윤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컵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창밖에는 부드러운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가끔씩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만이 들렸다.
도윤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런 일상이, 나쁘지 않네요.”
소은은 조용히 웃었다.
“저도요.”
도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불안했던 처음과 달리 편안해 보였다.
그는 이 작은 변화가 어쩐지 싫지 않았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일상은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함께 아침을 먹고, 저녁을 나누며, 가끔은 함께 영화를 보기도 했다.
소은은 이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편안해지고 있었고,
도윤 역시 그녀와의 시간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조금씩, 서로의 존재에 스며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허락까지 받은 두 사람은,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에 맞물린 작은 부품처럼,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갔다.
강 회장의 허락은 단순한 승인이 아닌,
두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거대한 계획의 시작을 의미했다.
소은은 마치 꿈을 꾸는 듯 멍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현실인지, 아니면 악몽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도윤은 굳은 표정으로 아버지의 지시를 따랐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거대한 파도가 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과연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부부로서 행동해야 한다."
강 회장은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 냉정했으며, 두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두 사람의 감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의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결혼식을 올리고, 언론에 발표할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도록."
강 회장의 말은 명령과도 같았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불안한 눈빛으로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렸다.
강 회장의 지시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빠르게 진행되었다.
도윤은 두 사람이 함께 살 집을 마련했다.
이전의 낡은 고시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넓고 깨끗한 아파트였다.
고급스러운 가구와 최신 가전제품으로 가득 찬 집은 소은에게는 너무나 낯선 공간이었다.
그녀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어색해하면서도,
동시에 이 모든 것이 계약의 일부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불편함을 느꼈다.
그녀는 이 공간에서 진정한 안식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혼식은 강 회장의 주도하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가까운 친척이나 지인도 초대하지 않은, 철저히 형식적인 결혼식이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소은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 촬영에 임했다.
그녀의 옆에는 굳은 표정의 도윤이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마치 계약 조건에 명시된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형식적인 부부의 모습을 연기했다.
결혼식 사진 속에서 소은은 홀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텅 빈 무대 위에 홀로 서 있는 배우처럼, 그녀는 어색하고 불안해 보였다.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결혼식 사진은 곧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강 회장은 언론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했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언론을 조종했다.
언론은 소은의 신데렐라 스토리와 강 회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가난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꿈을 키워온 여인과,
그런 그녀의 진심을 알아보고 아들의 사랑을 응원하는 존경받는 기업 회장의 이야기는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 감동했고, 강 회장의 기업 이미지는 더욱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강 회장은 언론의 찬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연극"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손안에 넣은 사람처럼 만족해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역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니… 모든 것이 잘 풀리는군.
이제 남은 것은… 이 연극을 얼마나 잘 마무리짓느냐겠지.
하지만…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강 회장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했다.
언론의 관심은 소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녀는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자신의 이야기가 언론에 의해 왜곡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유리 상자 안에 갇힌 것처럼,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이미지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모습이 지워지고, 언론이 만들어낸 가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녀는 숨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다.
도윤은 아버지에게 약속받은 대로 소은의 빚을 모두 갚아주었다.
소은은 빚에서 벗어난 것에 안도했지만, 동시에 도윤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는 그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제 빚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또 다른 굴레에 갇히게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도윤과의 계약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윤의 도움으로 소은은 다시 학교에 복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지만,
동시에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어색해했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낯선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이전의 평범한 삶을 그리워했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소은은 학업에 열중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은 이전보다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그림을 통해 표현했고, 그림은 그녀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녀는 그림 속에서만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도윤은 소은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그녀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닌,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조용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는 그녀에게 죄책감과 함께, 왠지 모를 연민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슬픔을 덜어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 두 사람의 "연극"은 계속되었다.
언론은 여전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주목했고,
강 회장은 언론 플레이를 통해 기업 이미지를 관리했다. 소은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했고, 도윤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의 관계는 계약이라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삐걱거리고 있었다.
강 회장은 소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맹수의 눈처럼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는 소은을 마치 사냥감처럼 훑어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만난 건가? 우연한 만남이라고 하기엔… 좀 빠르군."
그의 말에는 의심과 함께 노골적인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는 소은을 마치 벌레 보듯 대했다.
도윤은 아버지의 냉담한 태도에 분노를 느꼈지만,
소은을 보호하기 위해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아버지,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이 사람과…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강 회장은 도윤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소은에게 직접 질문했다.
그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가씨, 사연이 좀 기구하다고 들었는데… 어디 한번 이야기해 보시지.
얼마나 딱한지 한번 들어봅시다. 그래야 기자들도 기사를 쓸 거 아니겠나?"
강 회장의 말에는 조롱과 함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는 소은을 시험하려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고통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소은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도윤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부모님을 잃은 사고, 빚, 그리고 미술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신의 힘겨운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고 고통스러웠지만,
도윤과의 계약을 생각하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수치심과 함께, 이 모든 상황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벌거벗겨진 채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소은의 이야기를 듣는 강 회장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관객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은의 고통에 어떠한 공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언론에 내보낼 "거리"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소은을 꿰뚫어 보았다.
소은의 이야기를 듣는 강 회장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관객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은의 고통에 어떠한 공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언론에 내보낼 "거리"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소은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물과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에서 그가 원하는 "기구한 사연"의
완벽한 재료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소은의 이야기가 끝나자, 강 회장은 옆에 있던 기자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고,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연출한 완벽한 한 장면을 감상하는 감독처럼 흡족해했다.
"아주 구구절절하구만, 이 기자. 이번에 아주 잘 써 줘. 헤드는…
'진정한 사랑으로 개과천선한 재벌 2세 강도윤'…
뭐, 이런 식으로 하고… 기업의 회장은 그녀의 인성만 보고 아들의 사랑을 응원했다…
뭐 이런 미담으로 포장해 줘. 알겠나? 이 기자만 믿겠어.
이번에 제대로 한 건 해야지.
그래야 주가도 오르고, 기업 이미지도 좋아지지 않겠나?
안 그런가, 이 기자?"
강 회장은 기자에게 동의를 구하며 뻔뻔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론을 이용하여 대중을 조작하는 데 익숙해 보였다.
강 회장의 말을 듣는 도윤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냉정함과 언론 플레이에 대한 분노를 넘어,
소은에게 가해진 모욕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녀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초점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그녀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싶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강 회장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는 마치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듯 냉정하게 말했다.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이제 저녁 식사 시간이군.
이 기자, 저녁 먹고 가야지. 좋은 기사 써 줘야 할 텐데,
든든히 먹고 가야지 않겠나? 안 그런가?"
강 회장은 기자에게는 여전히 친절하게 말했지만,
도윤과 소은에게는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의 눈빛에는 두 사람에 대한 경멸과 함께, 이제 쓸모가 다했다는 듯한 냉담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을 마치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처럼 취급했다.
그는 두 사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다.
"도윤이와… 그 아가씨는… 아무래도 밖에서 먹는 게 더 편하겠지. 그렇지?"
강 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여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을 완전히 내쫓는 것이었다.
도윤은 소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버지에게 짧게 목례를 하고 소은을 데리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소은은 눈물을 참으려 애썼지만,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수치심과 슬픔, 그리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도윤의 손을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윤은 소은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는 그녀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소은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그녀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앞으로 이 "연극"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밤거리를 걸었다.
그들의 앞날은 더욱 불확실해졌고, 그들의 동행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그들의 "연극"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깊은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어둡고 긴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약이 성사된 후, 도윤은 소은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아버지께 당신을… 소개해야 합니다."
도윤의 말에 소은의 얼굴은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낯선 남자와의 계약 결혼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그의 아버지, 즉 거대한 기업의 회장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큰 부담감을 느꼈다.
그녀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그의 가족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되었다.
"저… 저는… 이런 모습으로… 회장님을 뵐 수는 없습니다…"
소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낡은 옷과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화려한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도윤은 소은의 걱정을 이해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준비하겠습니다.
당신은… 그저…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시면 됩니다."
도윤의 말에 소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음 날, 도윤은 소은을 데리고 고급 헤어샵으로 향했다.
화려한 인테리어와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소은은 잔뜩 긴장했다.
그녀는 이런 곳에 와본 적이 거의 없었다.
도윤은 그런 소은을 배려하며 편안하게 대해주려 노력했다.
헤어 디자이너의 손길에 소은의 머리는 세련된 스타일로 변신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달라진 모습에 어색해하면서도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
도윤은 달라진 소은의 모습에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숨겨진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헤어샵을 나온 후, 도윤은 소은을 데리고 고급 부티크로 향했다.
소은은 화려한 옷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이런 옷들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도윤은 소은에게 어울리는 옷들을 골라주었고,
그녀는 어색해하면서도 옷을 입어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소은의 모습에 도윤은 놀랐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수줍은 미소는 그의 마음을 약간 흔들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매력을 발견했다.
쇼핑을 마친 후,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차를 타고 도윤의 집으로 향했다.
소은은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어색해하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생경했지만,
도윤과의 계약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녀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려 노력했다.
도윤은 소은의 어색해하는 모습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불편하신가요?"
소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조금…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도윤은 소은의 말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어색하네요."
도윤의 솔직한 말에 소은은 조금 안심했다.
그녀는 그 또한 이 상황이 어색하다는 것을 알고 조금은 편안해졌다.
드디어, 두 사람은 도윤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거대한 대문과 웅장한 건물은 소은을 압도했다.
그녀는 숨을 크게 쉬고 긴장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도윤의 손을 잡고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심장은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도윤의 옆에 서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폭풍 전야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도윤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도윤은 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 또한 차가웠다. 그는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두려움이 앞서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잡은 두 사람의 손은 차갑고 떨리고 있었다.
마치 차가운 얼음 조각을 맞잡은 것처럼,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윤의 심장 또한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의 만남이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소은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의 떨리는 손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완전히 열리고, 두 사람은 아버지와 마주섰다.
소은의 불안한 눈빛과 도윤의 굳은 표정, 그리고 아버지의 날카로운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마치 무대 위 막이 오르는 것처럼, 새로운 "연극"의 막이 오르기 시작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세 사람의 그림자가 대문 앞에 길게 드리워졌다.
도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소은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계약 결혼이라니, 그녀의 인생에서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도윤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계약… 결혼… 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소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는 도윤의 얼굴에서 진심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하고 냉정했다.
그녀는 그의 눈빛 속에서 깊은 슬픔과 고독을 보았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도윤은 소은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읽고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정사와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결혼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는… 아버지께서는 기업 이미지 때문에 저를 결혼시키려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결혼이 아닌, 계약… 즉, 형식적인 결혼을 통해 아버지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저는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서로에게 좋은 거래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윤의 말을 듣는 소은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녀는 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독과 싸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 결혼이라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결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되돌아보았다.
부모님을 잃고 빚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 그리고 눈앞에 놓인 절박한 현실.
그녀는 도윤의 제안이 자신에게는 마지막 동아줄과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거절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회장님… 그러니까… 아버님께서는 저 같은 사람을… 탐탁지 않아 하실 텐데요…"
소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윤은 소은의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당신은 그저… 제 옆에 있어주시면 됩니다. 형식적으로… 부부로서… 제 옆에 있어주시면 됩니다."
도윤의 단호한 말에 소은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강한 의지를 느꼈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거절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제안이 마치 벼랑 끝에 선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길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볼 시간을… 주시겠어요…?"
소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윤은 잠시 소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충분히 생각해보시고 결정하십시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곧 저에게 결혼 상대를 데려오라고 하실 겁니다."
도윤의 말을 들은 소은은 더욱 초조해졌다.
그녀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빠른 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며칠 후, 소은은 도윤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밤새도록 고민한 끝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빚에서 벗어나고,
다시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도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인 카페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은은 도윤에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결혼… 하겠습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소은의 말을 들은 도윤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소은에게 감사를 표하며 계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박소은 씨. 우리는 이제… 서로를 위한 딜을 시작하는 겁니다."
도윤은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소은에게 계약의 목적과 조건을 명확하게 설명했다.
"저는… 당신과의 계약 결혼을 통해 기업 이미지를 회복시킬 계획입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여자를 만나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재벌 2세의 이미지를 언론에 퍼뜨려
아버지의 신임을 얻고, 동시에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도윤의 말을 들은 소은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말이 다소 차갑고 계산적으로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저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약 결혼을 선택했지만,
그의 말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도윤은 소은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당신의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합니다.
제 계획이… 당신을 이용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계약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한… 거래입니다."
도윤은 소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당신과의 계약으로 기업 이미지를 회복하면…
아버지에게 받을 돈으로 당신의 빚을 모두 갚아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계약이 아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윈윈(win-win)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윤의 말을 들은 소은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진심과 함께 어딘가 모를 간절함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제안이 자신에게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알겠습니다… 계약… 하겠습니다."
소은의 대답에 도윤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하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의 불안한 동행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계약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도윤의 갑작스러운 “계약 결혼” 제안에 소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도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녀는 그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계… 계약 결혼이라니요…?"
소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도윤의 얼굴에서 진심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하고 냉정했다.
그녀는 그의 눈빛 속에서 깊은 슬픔과 고독을 보았다.
마치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도윤은 소은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읽고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정사와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결혼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아버지의 냉정함과 자신의 절망감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저는… 아버지께서는 기업 이미지 때문에 저를 결혼시키려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결혼이 아닌, 계약…
즉, 형식적인 결혼을 통해 아버지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저는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도윤의 말을 듣는 소은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녀는 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독과 싸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 결혼이라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결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을 되돌아보았다.
부모님을 잃고 빚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
그리고 눈앞에 놓인 절박한 현실.
그녀는 도윤의 제안이 자신에게는 마지막 동아줄과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회장님… 그러니까… 아버님께서는 저 같은 사람을… 탐탁지 않아 하실 텐데요…"
소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다.
도윤은 소은의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당신은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당신은 그저… 제 옆에 있어주시면 됩니다."
도윤의 단호한 말에 소은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강한 의지를 느꼈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거절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 생각해볼 시간을 주시겠어요…?"
소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충분히 생각해보시고 결정하십시오.
내일 같은 시간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도윤은 소은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은에게 짧게 목례를 하고 카페를 나섰다.
소은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지만,
그의 제안은 그녀의 마음속에 깊은 파장을 남겼다.
다음 날, 소은은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했다.
그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다.
도윤의 제안은 그녀에게는 너무나 큰 결정이었다.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빚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동시에 낯선 남자와 가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잠시 후, 도윤이 카페에 들어왔다.
그는 소은을 발견하고 그녀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차분하고 냉정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박소은 씨."
도윤은 소은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소은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례했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도윤이었다. 그는 소은에게 자신의 상황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버지와의 관계,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의 강요로 맞이하게 된 결혼.
그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니…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윤의 말을 듣는 소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그의 아픔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부모님을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도윤의 이야기가 끝난 후, 소은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부모님을 잃은 사고, 빚, 그리고 미술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신의 힘겨운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저… 부모님께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후로… 빚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술 대학도… 휴학한 상태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은의 이야기를 듣는 도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그녀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과 절망을 보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자신과 같은 그림자를 보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고독,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무게.
그는 그녀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에게서 위안을 찾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계약 결혼이라는 불안정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들의 앞날은 여전히 불확실했고, 그들의 동행은 불안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서로에게 유일한 희망이 될지도 몰랐다.
카페 안에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 속에는 미묘한 감정이 오가고 있었다.
그것은 동정심일 수도 있었고, 연대감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아주 작은 희망일 수도 있었다. 그들의 불안한 동행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새벽 3시, 찜질방의 습하고 더운 공기가 소은의 잠을 짓눌렀다.
희미한 형광등 아래, 사람들의 코 고는 소리와 뒤척이는 소리가 뒤섞여 소음으로 다가왔다.
소은은 얇은 이불을 끌어안고 겨우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꿈속에는 빚 독촉에 시달리는 악몽이 계속되었다.
그때, 누군가의 손길이 그녀의 다리에 느껴졌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뜬 소은은 자신의 다리를 더듬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꺄악!"
소은의 비명 소리에 찜질방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발소리가 뒤섞였고,
소은은 떨리는 몸을 이끌고 찜질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차가운 밤공기는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찜질방 안의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은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더욱 불안해졌다.
그녀의 그림자는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마치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그녀는 끝없는 절망에 휩싸였다.
그녀의 심장은 공포에 질려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소은은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며칠 전 삼각김밥을 먹었던 공원 벤치로 향했다.
차가운 벤치에 앉아 그녀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의 몸은 차가운 밤공기에 오들오들 떨렸고,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마음은 절망과 공포, 그리고 수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마치 세상에 홀로 버려진 그림자처럼 외롭고 불안했다.
그녀의 작은 어깨는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다.
한편, 강도윤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서는 아버지와 새어머니,
그리고 배다른 남동생 두 명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목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도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이 집에서 영원히 이방인일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는 마치 유리벽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들의 행복에 함께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버지는 도윤을 발견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들어왔구나. 늦게까지 놀다 오지 않고. 네 녀석은 하는 짓이 늘 그 모양이지."
새어머니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남동생들은 도윤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도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는 마치 투명 인간이 된 것처럼, 그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버지는 다시 도윤에게 시선을 돌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너랑 어울리는 여자는 찾았겠지?
얼른 결혼해서 이 집에서 나갈 준비를 해야 돈도 챙겨갈 거 아니냐."
아버지의 말은 도윤의 마지막 남은 인내심마저 끊어 놓았다.
그는 더 이상 이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홧김에 집을 뛰쳐나왔다.
그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의 그림자는 어둠 속에서 더욱 길게 늘어졌다.
그는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윤은 무작정 밤거리를 걸었다.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며칠 전 공원에서
우연히 시선을 마주쳤던 여자가 앉아 있던 벤치였다.
그는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녀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과 함께 어딘가 모를 공허함을 읽었다.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시선이 끌렸다.
그때, 도윤은 벤치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도윤은 그녀가 며칠 전 공원에서 보았던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의 떨리는 어깨와 흐느끼는 소리에서 그녀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임을 직감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슬픔의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녀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괜찮으십니까?"
도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소은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낯선 남자의 모습에 더욱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그를 처음 보았다.
며칠 전 공원에서 스쳐 지나갔던 그 남자인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심장은 공포에 질려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소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도윤을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밤늦은 시간에 공원에서 낯선 남자가 나타난 상황에 그녀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도윤은 소은의 경계하는 눈빛을 보고 자신이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근처를 지나가다가… 울고 계신 것 같아서… 걱정돼서 다가왔습니다.
해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도윤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거나 과장된 친절을 베풀지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다.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소은은 도윤의 말을 듣고 조금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녀를 해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냥…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은은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낯선 남자에게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럽고 두려웠다.
도윤은 소은의 말을 듣고 그녀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는 그녀의 슬픔을 존중하고 싶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도윤은 소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어딘가 모를 고독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자신과 같은 그림자를 보았다.
침묵을 깬 것은 도윤이었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고민해 온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저…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강도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아주… 이상한 제안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도윤은 잠시 숨을 고르고 소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불안한 눈빛 속에서 희미한 희망을 보았다.
"저와… 계약 결혼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소은은 도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혼란과 당혹감,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그의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기분을 느꼈다.
소은은 며칠째 찜질방을 전전하고 있었다.
고시원에서 쫓겨난 후, 그녀가 기댈 곳은 단돈 몇 천 원으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찜질방뿐이었다. 눅눅한 이불과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그녀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짐 가방은 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마치 뿌리 뽑힌 잡초처럼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그녀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져 그녀를 짓눌렀다.
찜질방 한 켠에 마련된 작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아침 햇살조차
그녀의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 도시의 풍경은 낯설고 차갑게 느껴졌다.
아침 일찍 찜질방을 나선 소은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싸구려 삼각김밥 하나로 허기를 달래며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빚과 앞으로의 생계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미래는 짙은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불확실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고 불안했다.
그녀는 공원 벤치에 앉아 남은 김밥을 천천히 먹었다.
찬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몸을 움츠렸다.
한편, 강도윤은 아버지와의 냉랭한 대화 이후 더욱 심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강요에 따라 결혼 상대를 찾아야 했지만,
그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사랑 때문에 고통받았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랑은 사람을 파괴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적당한 여자를 찾아 계약 결혼을 하고,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그의 주변 모든 것이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듯했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화려한 건물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의미 없어 보였다.
어느 날, 도윤은 답답한 마음에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갔다.
목적지 없이 달리던 그는 우연히 작은 공원 앞에 차를 세웠다.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빛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고, 그의 마음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벤치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그의 무거운 마음을 형상화하는 듯했다.
그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도윤의 시선이 공원 한쪽 벤치에 머물렀다.
초라한 행색의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고독이 드리워져 있었다.
도윤은 왠지 모르게 그녀에게 시선이 끌렸다.
그녀의 그림자는 그의 그림자만큼이나 어둡고 외로워 보였다.
그는 그녀의 눈에서 깊은 슬픔을 읽었다.
마치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에게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소은은 벤치에 앉아 싸구려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잿빛 하늘과 텅 빈 공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마음 또한 텅 비어 있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벤치 건너편에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향했다.
그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고독이 드리워져 있었다.
소은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시선이 끌렸다.
그의 그림자는 그녀의 그림자만큼이나 어둡고 외로워 보였다.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진 사람처럼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과 함께 어딘가 모를 공허함을 느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소은은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남은 김밥을 마저 먹었다.
도윤 또한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차를 바로 출발시키지 못하고 잠시 멈춰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가 앉아 있던 벤치를 바라보았다.
도윤은 차를 몰고 공원을 나섰지만, 자꾸만 아까 그 여자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는 차를 세우고 다시 공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텅 빈 벤치를 바라보며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서 자신과 같은 그림자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처럼, 그는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소은 또한 공원을 나서며 아까 그 남자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의 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녀는 왠지 모를 아쉬움과 함께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녀와는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빛 속에서 숨겨진 슬픔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마치 깊은 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을 본 것처럼,
그녀는 왠지 모를 희망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자신과 같은 고독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스쳐 지나갔지만, 서로의 존재를 잊지 못했다.
그들의 만남은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신과 같은 그림자를 보았고,
그 그림자는 그들을 어렴풋이 연결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그들은 왠지 모르게 서로에게 끌리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
마치 운명처럼, 그들의 엇갈린 발걸음은 다시 만나게 될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스쳐 지나간 인연은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소은은 텅 빈 방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며칠 전 고시원 주인에게 받았던 퇴거 명령서는 구겨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짐 가방은 이미 싸여 있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앞은 캄캄했고, 현실은 마치 거대한 그림자처럼 그녀를 덮쳐왔다.
얇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져 있었다.
마치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반영하는 듯했다.
부모님의 사고 이후, 소은의 삶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빚은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세상은 그녀에게 냉정하기만 했다.
그녀는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지만,
빚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에는 희망 대신 절망이라는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져 그녀를 짓눌렀다.
소은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녀의 꿈이 담긴 그림들이 그녀를 위로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림 속 화려한 드레스와 액세서리들은 지금 그녀의 처지와 너무나 동떨어져 보였다.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그녀에게는 닿을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스케치북을 덮고 다시 웅크렸다.
그녀의 방은 그녀의 그림자를 닮아 더욱 좁고 어둡게 느껴졌다.
그녀는 방 한구석에 놓인 낡은 액자를 바라보았다.
액자 속에는 부모님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있었다.
그 행복했던 순간은 이제 아득한 과거의 기억이 되어 있었다.
며칠 후, 소은은 마지막으로 남은 돈을 털어 작은 빵 몇 개를 샀다.
그것은 당분간 그녀가 먹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녀는 공원 벤치에 앉아 빵을 먹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미래는 짙은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불확실했다.
그녀의 그림자는 더욱 길게 늘어져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마치 세상에서 버려진 그림자처럼 외롭고 불안했다.
찬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편, 강도윤은 고급 외제차를 몰고 도심의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만큼이나 그의 마음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냉랭한 관계,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진실,
그리고 아버지의 강요로 맞이하게 될 결혼. 모든 것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의 삶은 화려해 보였지만,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껍데기만 남은 그림자처럼. 그는 운전대를 더욱 꽉 쥐었다.
그의 눈빛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고, 그의 마음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도윤은 클럽에 도착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기운에 기대어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싶었다.
하지만 술은 그의 고통을 더욱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끊임없이 술잔을 채웠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고독과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마치 어둠 속을 헤매는 그림자 같았다.
그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다시 꺼내 읽었다.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글씨체는 그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는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거대한 권력 앞에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어머니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꽉 쥐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윤은 클럽을 나와 밤거리를 걸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의 불빛 때문에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그림자에 갇힌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목적지 없이 밤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소은과 도윤은 각자의 그림자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직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그들의 엇갈린 발걸음은 언젠가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될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들의 만남은 각자의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은, 짙은 어둠만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서로 스쳐 지나갈 뿐, 아직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빛을 쏟아내고,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은 윤이 났다.
웅장한 저택의 현관, 강도윤은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마치 그의 무거운 짐을 형상화하는 듯했다.
그는 이 화려함 속에서 오히려 더욱 고독을 느꼈다.
이 집은 그에게 안식처가 아닌, 끊임없는 고통과 갈등의 근원지였다.
도윤의 기억 속 가장 깊은 곳에는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웃었던 기억,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따뜻한 품,
그것들은 도윤에게 유일한 행복의 기억이었다.
어머니는 도윤에게 세상의 전부였고,
그의 작은 세상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도윤이 열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은 도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의 삶은 그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저택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슬픔에 잠긴 도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듯
갑자기 나타난 새어머니와 그녀의 두 아들이었다.
도윤은 그들을 보는 순간, 낯선 감정에 휩싸였다.
아버지의 태도 또한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새어머니에게 다정했고, 그녀의 아들들에게도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윤은 아버지의 변한 모습에 큰 혼란을 느꼈다.
어린 도윤은 새어머니와 이복 형제들을 받아들이려 노력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새어머니는 겉으로는 친절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도윤을 차갑게 대했다.
그녀의 두 아들들은 도윤을 무시하고 괴롭혔다.
도윤은 집 안에서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도윤은 우연히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장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관계,
그리고 점점 악화되는 건강에 대해 적어놓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도윤은 일기장을 읽으며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은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배신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로 인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다.
어린 도윤은 그 사실을 알고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진실을 따져 물었지만, 아버지는 냉정하게 모든 것을 부인했다.
오히려 도윤을 나무라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아버지의 냉담한 태도는 도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고,
그는 아버지와 세상에 대한 깊은 원망을 품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된 후, 도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고 스캔들을 만들며 아버지의 속을 끓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이자, 동시에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관심을 끌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에게 철저히 외면받고 싶어 했다.
그의 내면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고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방황하는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클럽의 화려한 조명 아래, 도윤은 술잔을 기울이며 과거를 회상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도,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고통의 메아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그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이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 도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의 비서였다.
"회장님께서 긴급히 찾으십니다. 지금 즉시 본가로 와주십시오."
비서의 딱딱한 목소리에 도윤은 짜증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이 클럽을 나섰다.
저택에 도착하자, 아버지의 서재로 안내되었다.
서재 안에는 차가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고, 도윤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네 녀석 때문에 기업 이미지가 바닥까지 추락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도윤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된 모습이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건 제가 꼭두각시처럼 아버지 뜻대로 움직이는 거겠죠."
"시끄럽다! 네 녀석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기업 이미지를 회복할 방안을 찾아오도록."
아버지의 말에 도윤은 더욱 반항적인 눈빛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절망했다.
그의 그림자는 더욱 길어지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력 앞에 무력함을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어떤 쇼를 벌이실 생각이십니까?"
도윤은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
아버지는 잠시 도윤을 노려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해라. 너와 수준이 비슷한 아무나 만나서 결혼하고 어서 이 집에서 나가라. 네 몫은 챙겨줄 테니 더 이상 내 눈에 띄지 마라."
아버지의 말은 도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저 쫓아내야 할 존재,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아버지에게는 흠집이었고,
이제는 결혼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흠집을 가리려 하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그의 마음은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저와 수준이 비슷한 아무나… 라뇨?"
도윤은 차갑게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슬픔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래. 네 녀석 수준에 맞는 여자 아무나 붙잡고 결혼해서 어서 이 집에서 나가라.
더 이상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아버지의 냉정한 말에 도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절망과 함께 차가운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철저히 외면당했고, 그의 존재는 완전히 부정당했다.
그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져 그를 완전히 집어삼킬 듯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서울의 밤,
낡은 고시원 건물은 도시의 소음에서 동떨어진 듯 고요했다.
삐걱거리는 복도를 지나, 3평 남짓한 좁은 방, 박소은은 희미한 형광등 아래
낡은 책상에 앉아 디자인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었다.
닳아 해진 팔꿈치와 연필 끝에 묻은 검은 흑연만이
그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렸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방은 마치 하늘 아래 놓인 작은 그림자 같았다.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방 안은 그녀의 고독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했다.
얇은 합판으로 겨우 막아 놓은 벽 너머 방의 소음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소은은 오직 스케치북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소은의 방은 그녀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벽지는 군데군데 뜯어져 있었고,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찬 바람은 얇은 담요 한 장으로는 막기 어려웠다.
겨울의 끝자락,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소은은 몇 겹의 옷을 껴입었지만,
스며드는 냉기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은의 눈빛은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인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디자인이라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현실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빚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었지만,
그것마저도 그녀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빚의 무게는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우는 것처럼.
소은의 머릿속에는 3년 전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벚꽃이 만개했던 봄날,
가족들과 함께 떠났던 짧은 여행은… 마지막 날이었다.
낡은 승용차 안, 소은은 창밖으로 펼쳐진 벚꽃 터널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어 있었다.
부모님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차 안에는 따뜻한 온기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돌아오는 길, 굽이진 산길을 달리던 차는 갑자기 마주 오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끔찍한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뒤엉켰다.
소은은 정신을 잃기 직전, 자신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마지막으로 기억했다.
그 따뜻함은 마치 마지막 행복의 조각처럼 그녀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눈을 떴을 때, 소은은 하얀 병실 천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온몸은 붕대로 감겨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낯선 약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짧은 한마디였다.
"보호자분들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은의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를 지탱해주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부모님의 따뜻한 미소,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들, 모든 것이 한순간의 악몽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그녀의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식되었다.
그녀는 환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림자와 같았다.
병원에서 퇴원한 소은에게 남은 것은 부모님이 남긴 빚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보험금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치료비와 장례비로 인해 빚은 더욱 늘어났다.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작은 옷 가게는 이미 빚 때문에 담보로 잡혀 있었고,
결국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소은은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낮에는 카페에서 서빙을 하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빚을 갚아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빚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를 쫓아오는 것처럼, 빚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소은 씨, 잠깐만요!"
복도에서 들려오는 고시원 주인의 목소리에 소은은 현실로 돌아왔다.
굳은 표정의 주인은 손에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 봉투는 마치 사형 선고와도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또… 인가요?"
소은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여러 번 겪었던 빚 독촉의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 달 월세도 밀리셨죠?
게다가… 전에 말씀드렸던 빚 문제도 그렇고… 더 이상은 기다려 드릴 수 없습니다."
주인의 말은 차갑고 단호했다.
소은은 봉투를 받아 들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봉투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현실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절망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치 하늘이 더욱 낮게 내려앉은 것처럼, 그녀의 시야는 어두워져만 갔다.
봉투 안에는 빚 독촉장과 함께 퇴거 명령서가 들어 있었다.
부모님이 남긴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려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상황이었다.
소은은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텅 빈 방 안에는 그녀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작은 방은 이제 그녀를 보호해 줄 수 없는, 텅 빈 그림자와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공간마저 그녀를 배신한 것이다.
책상에 엎드린 소은은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소리만이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부모님을 잃은 슬픔에 이어 빚더미에 짓눌려 희망조차 잃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그녀의 하늘 아래,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는 듯했다.
마치 세상에서 홀로 남겨진 그림자처럼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그림자와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만이 그녀를 덮쳐왔다.
그렇게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